1970년, 이대 앞 거리의 낭만을 말한다
1970년, 이대 앞 거리의 낭만을 말한다
  • 전소연 기자
  • 승인 2003.09.0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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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70년대, 그땐 그랬지 - 과거 기사

      2. 지금 이대 앞의 모습은? - 현재 진단

      3. 미래의 모습을 꿈꾼다 - 가상 기사

이화인과 가장 가까우면서도 먼 이대 앞. 인터넷여론부는 연재기획으로 이대 앞과 이화인의 생활을 시간 순으로 풀어볼 예정이다.

 

 


1970년 현재의 이화인이 태어나지도 않았던 시절, 당시의 이화인들은 통금 때문에 밤늦게 다닐 수 없었고 여대생이 지금처럼 술을 마시는 것은 꿈도 꾸지 못했다. 하지만 이런 엄격한 사회 분위기 속에서도 김활란 총장은 이화인들에게 “집안일은 물론 사회에서도 제 몫을 다하는 슈퍼 우먼이 돼라”고 가르쳤고, 이대생은 소위 ‘신여성’이라는 칭호를 들으며 옷깃의 교표를 뽐내고 다녔다. 양장점에서 맞춘 미니스커트를 입고 방과 후면 다방의 커피 한 잔을 즐기며 음악에 심취했다던 이 시대의 이화인은 현재 이화인의 모습과 사뭇 다르다.

유행의 선두는 변하지 않는다

기성복이란 게 없던 시절, 모든 사람들이 옷을 맞추러 종로로, 동대문으로 그리고 이대 앞으로 왔다. 현재의 정문에서 이대역에 이르는 거리는 1층 한옥집을 개조한 양장점이 주욱 늘어서 있었다. 양장점의 마네킹은 계절마다 앞다퉈 색색으로 변신했다. 이화인들은 양장점의 투명한 유리창 속 마네킹의 최신식 옷을 보며 자신의 스타일이 유행에 뒤지지 않는지 점검하곤 했다. 이들은 봄·가을이면 버버리 깃을 세워 한껏 멋을 부리고 다니다가 조금 추워지면 양장점에서 한창 유행하는 스타일의 코트를 주문했다. 직접 천·디자인을 선택해 자신만의 유일한 옷을 갖는 것이 바로 당시 멋쟁이 여대생의 성공적인 쇼핑 노하우였다.

낭만은 다방과 빵집에서 피어나고

신촌에 ‘독수리 다방’이 있다면 이대 앞엔 ‘빠리 다방’과 ‘숙녀 다방’이 있었다! 70년대 여대생에게서 음악과 커피를 빼면 낭만은 없다. 딱히 마실 것이 없던 그 시절 대학생에겐 사색과 낭만, 고독을 대변하는 커피가 항상 함께 했다. LP판이 가득 꽂힌 음악 다방은 여자친구를 기다리는 남학생에겐 기다림 터로, 여대생에겐 친구들과 수다떨던 추억의 공간으로 기억된다.

낭만은 다방 뿐만 아니라 빵집에서도 피어났다. 정문 앞의 ‘그린하우스’와 함께 지금 배스킨라빈스 자리에 있던 ‘월성당’도 이대 앞 명물로 꼽혔다. 빵집은 다방과 함께 대학생의 훌륭한 아지트였고 단체 미팅도 이뤄졌다. 빵과 사이다를 놓고 ‘로미오’와 ‘줄리엣’, ‘이수일’과 ‘심순애’ 쪽지를 뽑은 사람끼리 짝을 이뤄 이야기꽃을 피우곤 했다.

정으로 채워진 밥 한 공기를 먹기 위해

70년대에도 현재도 이화인은 ‘딸기골’과 ‘가미’를 기억한다. 학교 근처에 식당이 서너 개밖에 없었던 그 시절, C동(지금의 학관)에서 수업을 마친 이화인들은 삼삼오오 후문을 나섰다. 비가 오는 날이면 어김없이 후문가에 개울창이 생기지만 밥 먹는데 비가 문제랴. 딸기골에서 놓아준 징검다리로 개울을 건너 밥을 먹을 수 있으니 학생들의 얼굴엔 절로 화색이 돌았다. ‘가미’는 한 평 남짓한 공간에서 지금의 2층 식당으로 넓히기 까지 한결같은 맛으로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가미의 주인 아저씨는 때때로 집 떠나있는 기숙사생들의 가족이자 상담사가 돼줬다.

70년대 이화인과 함께 했던 또 다른 먹거리는 구운 옥수수였다. 이화인은 정문을 나서면서부터 구운 옥수수를 사서 입에 달고 다녔고 구루마(리어카)에 잔뜩 실린 사과를 발견하면 쓱쓱 문질러 깨물어 먹곤 했다.

양장점이 기성복을 파는 상점으로, 다방이 커피숍으로, 옥수수가 닭꼬치로 바뀌어도 이화 앞 거리의 코드는 변함이 없다. 코드가 같다는 것, 이것이 바로 1970년대의 이화인과 2003년 현재의 이화인을 강하게 묶는 연결고리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