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드니 올림픽 응원단의 자격으로 첫발을 내딘 곳은 달링하버 유도 경기장. 10시간 비행이라는 피곤한 몸을 이끌고 경기장에 도착했을 당시, 많은 사람들은 매달권에선 멀어져가는 한국 선수들의 경기를 보며 풀죽은 모습이었다.

그러나 북한의 계순희 선수가 경기에서 연승하자 응원단원의 얼굴엔 미소가 돌았고 잘 모른다며 입만 뻥긋하던 북한가요 ‘반갑습니다’를 목청껏 불렀다.

그리고 계순희 선수가 동메달을 획득했을 땐 급기야 눈물을 쏟기에 이르렀다.

북한 선수의 경기를 보며 울고 웃는 한국 응원단, 그리고 자신을 응원하자 감격해 고개 숙이던 계순희 선수. 처음엔 ‘왜 북한 선수를 응원해야 하는가?’라는 조금은 불만 섞인 생각을 하던 난 어느새 ‘통일은 당위’라는 명제에 대해 진지한 물음을 던지고 있었다.

남북한 이산가족 상봉, 남북한 선수의 올림픽 개막식 공동 입장에 이르기까지 지금 남북한은 철저히 서로를 외면하던 반세기의 법칙을 깨고 조금씩 다가서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사회적 변화에 대해 50대 이상은 통일은 무조건적이라 말하는 반면 20∼40대 전후세대는 통일할 경우의 득과 실을 먼저 따지고 적지 않은 수는 통일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보인다.

물론 북한에 어머니가 살아계시거나 어린 시절의 추억이 서려있는 세대와 그렇지 못한 세대가 생각하는 통일은 차이가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는 단순히 경험의 차이라고만은 할 수 없다.

지금의 전후세대는 초등학교에 입학 하면서부터 사람을 도끼로 무참히 살해하는 인민군을 영화로 봤고, 빨간 손에 털이 수북한 공산당이 나오는 포스터를 그렸다.

하지만 철저한 반공교육 속에서도 한핏줄인 남과북은 통일이 돼야 한다고 주입 받았으니 통일에 대한 생각도 이중적이기 마련이다.

통일을 하긴 해야겠지만 감수해야 할 사회적 손실과 혼란이 너무 크다는 입장. 이는 이념과 체제중심 그리고 경제논리로 풀어가는 통일교육이 낳은 결과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통일이 된지 10년이 지난 독일에는 ‘오시’와 ‘베시’라는 말이 있다고 한다.

‘오시’는 서독인들이 동독인들을 부르는 말로 자율과 성취욕이 부족한 사람들이라는 뜻이며 ‘베시’는 동독인들이 서독인들을 지칭하는 말로 돈만 아는 사람들이란 뜻이라고 한다.

베를린 장벽은 허물어 졌어도 ‘마음의 장벽’은 허물어지지 않은 것이다.

통일에 대한 생각이 남한 내에서도 분분한 상황에서 통일된다 한들 한반도에도 ‘베시’와 ‘오시’같은 말이 생기지 않으란 법은 없지 않은가. 통일의 주역이라 할 수 있는 지금의 중고생 통일교육도 앞선 세대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한다.

북한의 청소년들은 철저한 군사교육을 받고 김정일의 생일을 위해 혹독한 축하공연을 준비한다고만 교육받았을 때, 남한의 청소년들은 그들도 때로는 이성문제로 고민하고 부모님과의 갈등을 겪는 또래 아이라는 사실을 인식할 수 있을까? 북한에 대한 이념이나 체제중심의 이성적 접근 보다는 북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얘기를 중심으로 한 문화이해적 접근이 가능할 때 우리는 ‘마음의 장벽’을 허물 수 있을 것이다.

통일에 대해 득과 실을 따지던 내가 북한 선수를 응원하며 진심으로 울고 웃을 수 있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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