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정말 너희 언니를 이해 못 하겠어” 지난 여름 오랜만의 전화통화중에 친구가 던진 말에 난 뭐라 답변을 궁색하게 늘어 놓아야 좋을 지 몰랐다.

그 당시 나의 언니는 노동자분들의 농성에 함께 하고 있던 중이었다.

‘80년대 군부독재의 폭압에 저항한 학생들의 행동은 정당했지만 지금은 분명히 상황이 달라졌잖아요’‘구태의연한 거리시위나 노동자연대라는 것이 사람들에게 호응을 못받잖아요’1학년들의 세미나속에 쏟아지는 학생운동의 ‘촌스러움’은 시대에 뒤떨어진 ‘과격한’운동방식에 대한 일반 학생들의 거부감으로 나타난다.

이런 흐름과 함께 ‘나름대로의 운동’론은 학생사회에서 급속도로 수혈되고 있다.

변혁보다는 개혁으로, 시민의 상식수준에 맞게 전문적으로 파고들어야 한다는 그들의 세련된(?) 논리에 따른다면 나의 언니같은 학생들의 현장노동자들과의 물리적 연대는 한갖 소용없는 짓일 뿐이다.

학생운동의 ‘방법론’에 대해 문제제기되는 상황 속에는 현 사회를 제대로 볼 수 없게 하는 위험한 ‘함정’이 도사린 듯 하다.

‘변화’된 현실애 초점을 맞추다 보면 아직까지 ‘변하지 않은’사회의 모순으로 인해 고통당하는 사람들은 사각지대로 몰릴 수 밖에 없다.

우린 아직도 철거민이 집 한 칸 얻으려다가 방화로 인해 목숨을 잃고, 일하러 간 직장에서는 용역깡패들이 무자비한 폭력을 휘두르는 사회에 함께 살고 있는데 말이다.

모순과 불편부당함, 거대한 폭력이 아직도 우리 사회를 지배해 소외당하고 억눌린 대중이 있는 이상 그들과 함께 하려는 학생들의 직접적인 연대방신은 ‘용도폐기’될 수 없다.

오히려 대중과의 접점에서, 모순이 극대화된 현장에서 이 사회의 ‘슬픈 현실’을 온몸으로 부딪혀 깨뜨리려는 학생들의 몸짓 하나하나가 더더욱 절실하게 요구되는 것이 아닐까. 누군가의 말을 빌어 언니와 같은 사람들을 위한 변명을 시작해야 겠다.

‘변혁을 외칠 수 없게 된 이 시대에 소외된 대중과 함께 짓밟힘으로써 활동가는 비로소 활동가가 된다.

온몸으로 ‘옳음’을 고수하는 사람들이 있어야만 우리 사회의 ‘옳음’을 구체화 시킬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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