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몸, 작은 꿈... 어린날의 작은 집은 큰 몸이 되어 다시 찾아니 무엇에 홀린 듯 조그맣기만 하다.

두 살터울 동생과 달려도 달려도 끝이 없던 그 방., 그 마루는 온 몸을 먼지투성이로 뒹굴어도 한없이 넓어 온 세상이 다 우리집에 있는 것만 같았고. 그러나 아버지의 등... 낮이 돼도 나가지 않는 아버지는 너무나 거대했다.

온 집안이 아버지의 등으로 가득 메워지는 것만 같았다.

나는 비로소 내 세계가 작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아버지의 첫 직장에 관해 처음 알게된 것은 초등학교 6학년 때. 나는 아버지께 가끔 우연히 생각난 듯 지나가는 말투로 당신의 젊은 시절에 관해 여쭤보았다.

그러나 그럴때마다 단호한 것은 ‘대학가면 다 배운다’는 말씀뿐이었다.

그 이후 몇년에 걸쳐 지금까지 나는 아버지 이외의 분들로부터 조각조각 진실을 얻을 수 있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4대 일간지 중 하나로 꼽히는 모 신문사에 들어갔으나, 유신 이후 언론인들에 대한 대규모 해직으로 그 직장을 잃게 됐다는 것이 그 중 한 조각이다.

어머니께서는 아버지와 동료들의 농성장으로 벽을 뜯고 들어온 깡패들에 관한 이야기를 해주셨다.

그리고 뒤숭숭한 집안에서 아무 품에도 안겨보지 못한 채 윗목에 혼자 방치됐던 아기동생의 이야기도. 발가락을 기워 신은 양말에 팔꿈치, 무릎에 천을 덧대 기운 내복을 입었다.

맛있는 게 먹고 싶어도 어린 마음에 체득된 가난은 어머니를 조르지 않았다.

지독히도 빠듯하던 살림형편, 사춘기를 겪으며 갑갑하고 때론 부끄럽기까지 한 우리의 생활에 대해 나는 아버지께 묻고 싶었다.

대체 무엇이 아버지로 하여금 우리를 이렇게 만든 것이냐고. 아무도 듣지 않는 공허한 메아리처럼 그 단어들은 스스로에게 상처가 됐지만, 결국 나는 아무 것도 묻지 않았다.

꼭 2년전 이맘 때쯤 언론이란 것에 관해, 아버지의 삶을 바꾸어 놓은 그 의지에 관해 알고 싶어 지원했노라 수습기자 면접에서 나는 이야기했었다.

그 후 이안에서 언론과 정의와 인간에 대한 수많은 화두들과 맞닥뜨리며, 치열함보다는 회의스러움으로 대학시절의 반이 지나갔다.

오늘까지도 나는 아버지께 그 질문을 하지 못했다.

그러나 지켜야 할 것으로부터 달아나지 않은 아버지께, 이젠 그 질문 대신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다.

아버지가 일궈온 세상을 더이상 휘어진 눈물로 바라보지 않겠다고. 이제 다시는 부끄러운 딸의 삶을 살지 않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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