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2월, 일본군 위안부 기획기사를 취재하던 중 만난 변영주 감독은 아직‘낮은 목소리’를 보지 못한 나에게 당부했다.

할머니들 영화를 보면서‘불쌍하다’라며 울지는 말라고. 같은 만큼의 아픔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동정으로 나오는 눈물이라면 그것은 이미 자신과 억압받고 있는 여성의 현실을 타자화 하고 있기 때문인 것이라고 말했다.

“전도 유망한 앞길을 위해 전진하자, 미래는 개척하는 자의 것이며 나는 세상의 모짐을 뚫고‘선택당한 부류’가 되고 싶다!” 굳센 결의를 다지면서도 현실의 벽을 외면하고 싶어하는 우리의 움추림은 감히 몇십년 전의‘강제로 연행된 일본군 위안부’할머니를 언젠가 선택당할지도 모르는‘나’와 비교하는 것에 오히려 낯설어 할런지도 모른다.

할머니는 나와 똑같은 제2의 성(물론 제1의, 정상적이고 과학적으로도 보호받는 완벽한 성은 남성이다)을 가지고 있고 단 한가지 그 이유만으로도 할머니와 나는 도무지 자유롭지 못한 존재임에 분명함에도 말이다.

나만 자유롭지 못한 것은 아니다.

주체적으로 선택‘하는’것이 아닌 선택‘당할 수 밖에 없는’상황들은 언제나 반복돼왔다.

백인침탈자가 현지인에게 선택적으로 부여한 지위는 문명의 이기를 이용할 자격이었고, 자본가가 노동자에게 선택적으로 부여한 지위는 나라의 발전을 도모하는 사업역군이었다.

또한 남성이 여자에게 선택적으로 부여한 지위는‘명예남자’인 것이다.

지위를 부여하는 주체는‘차이’를 ‘차별’로 변하는 통로를 지배하는 막강한 권력을 소유하고 있게 된다.

그래서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차이에 칼을 들이대 우월과 열등, 강함과 약함의 구조로 나누고 힘과 정복의 질서로 세상을 돌아가게 한다.

그래 모든 사실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실제로 우리가 중얼거리는 말들은 무엇인가‘이상과 현실은 괴리되기 마련이야’라 말하며 나 스스로도 선택당하길 원하며 억압받는 현실에서는 끊임없이 자신을‘타자화’시키는 것은 아닌지. 주변부에 속한 사람들은 언제나 많은 피해의식에 시달려 왔기에 변화의 빠른 길을‘나홀로 성공’에서 모색하려 하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정복의 논리에 순응하며 찾는 길과 차이가 차별이 되지 않는 사회를 위해 내가 서있는 주변부에서 변화의 노력을 하는 것 어느 것이 정말 이상과 괴리도지 않은 길인지는 생각해 볼 일이다.

순응의 길과 더디가는 작은 길, 나는 어디에 서있는가.
저작권자 © 이대학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