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속도로 돌아가는 현대사회에선 하나의 절대적인 가치추구보다 자유민주주의라는 대전제아래 서로를 인정해야 한다고 가르쳐왔다.

그러나 더이상 획일적인 형태를 요구하기보다‘서로를 인정해야 한다’는 명제로부터 출발하는 시대적 요구는 현재 또다른 갈등국면으로 치닫고 있는 듯 하다.

끝끝내 한의대생들이 집단제적을 면할 수 없었던 한약학분쟁은 결과적으로 풀리지 못한 그리고 풀릴 수 없는 긴장의 터전으로 몰아가고, 꼭 한약학분쟁을 예로 들지 않더라도 자본주의적 생산의 개별관계들 속에 내재하는 갈등이 크게는 노동자와 자본가로 확장되기 마련이다.

이렇게 팽팽하게 맞서기만 하는 양쪽의 주장은 분쟁을 지켜보는 시민들에게 관심을 유도하기 보다 무감각하고 냉소적인 버릇을 들이고 이렇게 양측을 둘러싼 충분한 고민없니 내놓은 정부의 정책은 졸속일 수 밖에 없다.

절대적 권력보다 서로를 인정하자는 사회적 분위기의 전환은 변증법에 대한 가치혼란을 가져오게 됐다.

시대가 바뀌었다 해도 계속적으로 파생되어져 나오는 사회적 갈등문제를 설명하기엔 이‘만능’변증법도 한계상황에 다다른 것처럼 보인다.

모든 모순을 풀 수 있다고 맹신해왔던 변증법적 사고는 이제 하나의 평정된 지평을 재구축할 가능성을 제공하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너와 나, 그 다름을 인정하자는 민주주의의 명제는 이미 첨예하게 대립할 수 밖에 없는 이율배반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그 안에서 평정을 요구하는 것은 현실에 비춰봤을 때 부질없는 욕망이다.

그것도 끊임없이 저지되면서 언제나 전보다 더 큰 규모로 다시 돌아오는 일종의 불가능한 종합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이뤄지는 통합의 변증법은 이 사회내에 만성적으로 퍼져 진정한 변증법적‘종합’의 과정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을 수 있다.

갈등의 해결 불가능이, 일관되고 정당한 연속성이 자리잡는 변증법적 사고를 방해하는 것이다.

갈등성이 해결되지 않으면 권리의 정당성은 더이상 지탱될 수 없다.

합에 이르기까지 필요조건으로 요구되는 권리의 호가실성은 실질적으로 봉쇄된다는 얘기다.

이렇게 맞딱드리게 되는 모순은 변증법적 사고에 길들여진 우리들을 다시금 되돌아보게 한다.

정과 반이 합으로 나아가는 역동적 발전의 개념인 변증법적 사고에 익숙해진 우리들이 은연주엥 갈등성에 대한 사회적 찬미를 부르짖고 있는 것은 아닐지. 진정한 합을 끌어내기 위해서는 정과 대립되는 반의 과정이 필요하지만 서로 인정하기만을 강요함으로써 감정적 대립과 파국적 위기로의 봉착을 야기하는 이 사회는 진정 변증법적으로 나아가고 있는지 따져볼 일이다.

저작권자 © 이대학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