ㅌ우애령의 「투르만스버그로 가는 길」 내 삶 속으로 걸어온 사람의 이야기 잡다한 이야기들이 더 이상 수다가 아니라 그들만의 세계요, 비밀이 되고 그(그녀)의 흔적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싶은 마음에 설레일 때 우리는 그것을 사랑 혹은 인연이라 부른다.

증오로서 숱하게 버렸지만 잊혀지기 보다는 잊고자 하는 생각에 괴로울 때 우리는 그것을 악연이라 부른다.

이 인연과 악연은 동전의 양면이다.

그(그녀)로부터 떠나있을 때 자유의 맛을 보는 게 아니라 살 맛을 잃고 있다면 그(그녀)는 분명 내 삶 속으로 걸어온 사람이다.

우애령의 소설 「투르만스버그로 가는 길」의 주제는 운명이다.

그러너ㅏ 「투르만스버그로 가는 길」에서의 운명은 체험이나 한이라는 처절한 정서와 만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고독과 닿아있다.

고독은 메마른 것이지만 예민한 것이어서 고독한 인간들과의 만남은 즐겁지는 않아도 따뜻하다.

물론 이 때의 따뜻함이란 모든 것이 포용되는 넉넉함에서 비롯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물신이 지배하는 땅에서 모처럼만에 만난 인간냄새가 가져다주는 슬픈 공감에서 비롯된다.

모든 것이 물신의 성육신이어서 우리 영혼도 결국 물신의 예배당이 된 상황에서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을 잃지 않는 인간을 볼 때 배어나오는 그러한 따뜻함은 가슴 아프고 불안한 것이지만 이지러지고 찌그러져 가는 우리 영혼에 대한 어떤 치유력이 있음에 분명하다.

「투르만스버그로 가는 길」의 주인공 명희는 그렇게 고독하다.

아버지와 살지 못해 도망간 어머니, 북에 두고 온 가족 때문에 늘 향수병에 시달리는 무력하고 쓸쓸한 아버지, 그리고 가난. 명희의 사춘기를 지배했던 것은 이런 것들이다.

그런데 그런 젊은 날을 자신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버텨온 간호사 명희의 삶에 운명처럼 다가온 남자가 의사 영우다.

과부인 어머니의 인생이며 일생인 영우는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어머니, 물신의 성육화인 어머니로부터 놓여나고 싶었지만 어머니는 그녀에게서 아들을 놓아주지 않는다.

어머니는 일종의 늪이다.

당연히 속얼굴이 닮아있는 이들의 사랑은 유희가 아니라 모든 답답함과 이해받지 못함을 허물어내리는 일종의 의식으로서 숨막히는 현실의 유일한 숨구멍이 된다.

물론 영우 어머니의 부당한 대우로 명희는 영우를 떠나 미국으로 건너가고 영우의 기억을 잠궈둔 채 불꽃같은 정열 대신 아버지처럼 편안한 교포 마이클과 결혼한다.

거기서 명희는 가족들에게 소외되고 사회에서 소외왼 노인들의 삶을 돌봐주는 양로원 원장이 된다.

양로원 노인들의 생과 사랑, 이들의 결혼을 상속권 때문에 노망이라고 반대하는 가족들의 이야기도 우리를 생각하게 한다.

투스만스버그로 가는 길은 이 소설의 주제가 되는 운명의 길이다.

이 길이 운명이 길이 된 것은 자신의 운명을 아는 것이 운명을 바꾸지 못했던 오스모에 관한 사유실험을 한 테일러교수가 살고 있기 대문이다.

『운명을 아는 사람들의 갇혀있는 뜰』이라는 이 소설의 부제는 명희와 테일러 교수의 만남으로 구체화되는 듯하다.

오스모의 이야기가 보여주는 것은 「갇혀있는 뜰에서 벗어나보려는 어떠한 몸부림도 운명을 바꿀 수 없다」는 것이지만 그것을 통해 작가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운명을 바꿀 수 없다는 의미에서 숙명이라기보다는 「갇혀있는 뜰을 벗어나려는 그 몸부림이 바로 인생」이라는 것일 것이다.

그러나 작가가 의도한 것과 상관없이 오스모에 관한 이야기는 너무 작위적이어서 문학적으로 체화되지 않았다는 느낌을 준다.

오스모에 관한 이야기는 그 구조에 있어서는 소포클레스의 「외디푸스왕」을 연상시키지만 「외디푸스왕」이 문학적으로 체화된 것이라면 철학자의 사유실험에서 나온 오스모에 관한 이야기는 확실히 작위적이다.

물론 이와 같은 비판이 「투르만스버그로 가는 길」이 좋은 소설임을 해치지는 않는다.

우리는 우애령의 소설에서 운명을 아는 사람들의 갇혀있는 뜰이 자폐가 아니라 고독이고 고독한 주인공들의 고독함 속에서 베어나는 따뜻함을 읽을 수 있으며, 운명을 예감함으로써 갖게 되는 운명이 낸 상처의 자생적인 치유력에서 인생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을 본다.

1968년 우리학교 독문과를 졸업하고 40이 훨씬 넘은 나이에 문단에 데뷔한 우애령의 늦은 출발이 원숙한 출발이 될 것을 믿는다.

이주향 철학과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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