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판 「꺼삐딴 리」 『흥, 그 사마귀같은 일본놈들 틈에서도 살았는데, 양키라고 다를까… 혁명이 일겠으면 일구, 나라가 바뀌겠으면 바뀌구 아직 내가 살 구멍은 막히지 않았다.

나보다 얼마든지 날뛰던 놈들도 있는데, 나쯤이야…』 (소설 「꺼삐딴 리」중에서) 일제치하와 광복후 미군정시대처럼 역사가 변절을 강요하면서 시대감각에 따라 옷을 바꿔입는 변절자들이 법석대던 시대가 있었다.

지금은 물론 일제시대도 미군정시기도 아니다.

하지만 격동의 한국사는 역사의 변절자를 낳았고 아직도 그들은 이 땅을 밟고 있다.

지난 16일(월) 여당대표가 5·16주역들과 함께 기념식을 갖고 박정희 대통령묘소를 참배하는 보도를 본 국민들은 씁쓸한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소위 4·19혁명정신을 계승한 「문민정부」가 5·16사건을 「군사쿠데타」로 규정한 사실을 떠올리면서 말이다.

5·16쿠데타는 1960년 이승만 정권의 독재를 국민의 힘으로 무너뜨린 4·19혁명이후 과도내각을 군부가 장악한 제 3공화국의 시발탄이었다.

이는 또한 우리나라 역사상 군부독재라는 지긋지긋한 폭정과 국민탄압의 시작을 알리는 사건이기도 했다.

이 사건의 주역이자 새까만 선글라스와 푸르죽죽한 야전잠바의 소유자였던 쿠데타우두머리는 여당대표가 모시던 분이었다는데. 그는 일등공신으로서 치욕적인 64년 한일회담에서도 맹활약을 펼쳤다.

민족의 자존심은 오데로 갔는지 『독도를 팔아버리자』고 말하면서까지 국민의 의사를 무시한 채 한일외무장관회의를 진행시켰던 것이다.

그러나 철옹성같던 그의 우두머리를 무너뜨린 또 하나의 군부 쿠데타 12·12사태로 5공화국시절 그는 궁지에 몰린 생쥐꼴이었다.

3·4공시절 당내서열을 무시하고 대통령 출마를 선언하며 이른바 「40대기수론」을 주창했던 양 김씨는 나름대로 재야세력으로 자리를 잡았으나 그는 「권력부정축재」라는 죄명으로 연행될 정도로 고지식하게(?) 한우물만 팠던 것이다.

그러나 의지의 한국인상을 보여주듯 그는 또 다시 제3야당을 창당함으로써 제2의 탄생을 꿈꾼다.

그러던 어느날, 그에게 절호의 기회가 주어진다.

90년 민정·민주·공화당 총재가 3당합당을 선언함으로써 밀실야합에 참여, 야권의 대결정치를 기대하던 국민들을 분노케 한다.

그는 이 분노에 아랑곳없이 집권당굴에 기어들어가 다시 한 번 그들의 오른팔임을 자처하면서 자신의 정치생명을 연장시켜보려는 속셈을 보였다.

험난한 정치파도를 잘도 뛰어넘었던 그는 이제 자칭 문민정부의 충실한 시녀로 여생을 즐기고 있다.

하지만 그는 요즘 또 2등자리가 싫증이 났는지 서서히 두마리 고래가 빠져나간 바다를 혼자 차지해버리려는 욕심을 내고 있는 듯하다.

지난 2월 1일 간담회에서 이제 물러날 때가 되지 않았냐는 질문에 『숲은 아름답고 어둡고 길다.

그러나 나는 잠자기 전에 몇마일을 더 가야 하다』고 답변하는 그가 앞으로 과연 시대적 상황에 따라 갈아입을 옷이 얼마나 되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5·16을 한때 무모했던 일이라고 일축했던 그의 「사상개조」와 정권이 바뀔 때마다 새로운 패션을 주장하는 그의 정치는 이젠 길고도 지겨운 멜로드라마일 뿐이다.

기나긴 군부독재출발을 쌍수들어 환영했던 그가 자칭 문민정부의 나팔수가 되었다고 해서 국민들이 색안경을 벗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이지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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