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지식인들이 부모의 맹렬한 반대를 뿌리치고 농촌으로 뛰어들고 있다.

그들은 이렇게 외치고있다.

『짜르체제에 대한 저항 고취!』『농촌부흥!』이른바 「인민에게로의 운동」을 펼친 이들은 바로 나로드니끄(인민주의자). 그러나 이들에 의해 주도된 「인민에게로의 운동」의 첫 물결은 오래지 않아 꺾여버리고 만다.

농민의 무관심도 컸으며 경찰의 탄압은 더욱 광포했다.

이는 다름아닌 1860년 러시아의 모양새였던 것이다.

× × × 나는 「1991년」여름의 조각조각 흩어져 보이는 일들에 관해 적고자 한다.

우선, 6.3정총리 사건이후 궁지에 몰린 우리는 새로운 돌파구 마련을 위해 떠났던 91년 여름농촌활동을 무사히(?)마치고 돌아왔다!ㅡ바로 농촌의 여름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다시 만난 경북안동은 변함없는 모습이었다.

변할 이유가 있겠는가? 새벽 5시에 일어나 논·밭에서 일하고 오후 10시에 집으로 돌아오는 농부의 생활이 변했을리 없고 작년 고추파동으로 맺혀진 울분에 멍든 가슴 또한 아물리 있겠는가 말이다.

우리의 농촌활동은 결국 예나 다름 없는 농촌의 모습을 확인한 채 돌아온 셈이다.

그러나 변하지 않은 것이 또 있었던 것이다.

우리 농활대가 ××면에 들어올 수 있도록 큰 도움을 주신 30대후반의 강××아저씨는 경찰로부터 관심의 전화를 끝없이 받아야 했고 강원, 충남지역에서는 각마을의 이장, 통장등 유력한 인사에 의해 저지당해 농활대입촌자체가 거부되었다는 소식도 들려왔다.

모 마을의 「마을잔치」는 더욱 가관인것이, 마을잔치를 뭐 대단한 연대집회로 상정한 탓인지 전경은 지켜봐주고 학생·농민은 판을 벌이고……. 심지어 대학생 농활매도에 격분해서 음독중태에 빠져있다는 충남 예산지역의 농민아저씨의 모습은 하나의 해프닝으로 넘기기엔 웃지못할 아련함인 것이다.

6.3정총리사건이후 학생들에게 내려진 수배·구속등 발빠른 조처로 바빠진것은 검찰뿐만 아닌 듯 싶다.

교육부는 지난 6월 24일 대학총·학장및 학생처 과장앞으로 보낸 「대학생 농촌활동 적극지도」라는 공문서를 통해 「지도교수및 대학행정직원이 현지에서 직접지도……의료·기술부문등 봉사활동만이 가능」하다는, 사실상 농활금지를 지시하고 있다.

결국 종이 한장으로 우리는 91년을 마지막으로 농활을 끝맺게 될 판이다.

농민에 대한 이해 부족이라는 한계속의 『인민에게로! 인민에게로!』운동의 외침이 꺾인지 1세기를 넘어서 21세기를 향해가고 있는 「1991년」. 이시대의 대학생「농촌활동」이 불순하다는 족쇄로 채워진채 변함없이 구태의연한 탄압조처등으로 「농활」이 좌초되는 비운을 또 맛보아야만 한단 말인가! 김미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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