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전 한 일간지에는 형체를 알아보기 힘든 네장의 사진이 게재되었다.

찢겨져 심하게 부패된 사람의 오른팔과 뒤틀린 쇳조각, 반쯤 타버린 구명조끼, 태극마크가 새겨진 기념패넌트. 바로 소련정부기관지 이즈베티야가 공개한「KAL기 잔해」의 사진이다.

83년 9월 1일, 2백 69명의 생명을 일순간에 앗아간 소련의 KAL기 격추사건은 8년이 지난 지금에도 명확한 해명없이 시간의 흐름과 함께 조용히 잠재워졌다.

『항공기의 위아래서 점멸등이 깜빡이는 것을 보고 민간기이면서 수송기라는 것을 알았다』얼마전 일본 아사히TV와의 인터뷰에서 당시 KAL기를 격추시켰던 전투기 조종사가 밝힌 내용이다.

이로써 민간용인줄 몰랐다던 소련측의 주장은 「새빨간 거짓말」이 되었다.

KAL기 격추에 대한 해명요구가 소련과의 공식적 외교관계가 없었기때문에 당시에는 어려웠다고 치자. 90년 9월 30일부터 한소수교가 정식으로 수립, 경제협력, 문화·학술교류로 친밀함을 더해가는 지금은 어떠한가? 정부는 지난 1월부터 KAL기 관련 정보 및 자료제공요청과 진상공개를 소련에 4~5차례 촉구했으나 변명 한마디 얻어내지 못했다.

47차 에스캡에 참석차 한국에 왔던 로가초프 소련 외무차관은 외신보도만으로 반소감정이 일고 있다고 오히려 불만을 표시하는가 하면,「소련은 이미 유감의 뜻을 표했고 냉전이 격화되는 시기에 생긴 사건이나 이제 냉전은 과거의 일이 되었다」며 KAL기 격추에 대한 진상규명을 회피하고 있다.

그러나 피해당사자가 아닌 일본의 방송이 KAL기 사건의 진상을 밝히려는 노력을 하고, KAL기 사건 유족인 일본 노부부가 소련 대통령에게 진상공개요구서한을 보낸 것과는 대조적으로 우리 정부측의 관심과 노력은 극히 미미한 것이다.

오히려 고르비 방한이다, 자매결연이다 하며 소련에 대해 무조건적인 우호적 태도를 보이고 있다.

정부는 소련과의 외교가 마치「6공의 대단한 업적」인양 자랑하기에 급급하고, 국내경제사정이 불안정한데도 30억달러라는 막대한 협력을 성큼 약속했다.

지난 9일 신문과 방송은 일제히 19일 고르비의 방한을 상당한 외교성과처럼 떠들썩하게 보도했다.

우리나라를 목적으로 오는 것도 아니고 일본에 갔다가 제주도에 잠깐 들러 서울에 있는 대통령을 불러내서 하는 비정상적인 정상회담인데도 말이다.

소련과의 올바른 국제관계를 위해서는「굽혀 들어가기」식의 손잡기보다 우리민족이 당한 아픔에 대한 정중한 사과와 배상이 선행되어야 한다.

외교는 결코 과시나 정부의 업적을 나타내기 위해 이루어져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연선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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