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오(Mao)의 문화혁명(1966~76)은 대중노선에 기반한 사회주의운동이었다.

이것은 사회주의사상의 우선성에 입각해서 생산력 증진과 공산사회 수립을 도모하고자 한 것이다.

그리고 이 사상은 무차별적 평등주의의 색채가 짙은 성격을 가진 것이었다.

따라서 과학과 생산 및 관리에서의 전문가를 이차적인 것으로서 경시하게 되었다.

또한 이 사회운동은 이대조적 전통의 새로운 맥락에서의 부활이라고도 할 수 있는 요소를 지니고 있다.

즉 계급경쟁을 과거와 미래에서의 사회발전의 동력으로 파악하는 역사와, 청년의 웅대하고 강건한 정신에 입각한 주의주의적 행동주의가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대약진운동(1958~60)이전에 제기되었던 당의 노선과는 대립되었다.

원래 당의 노선은 혁명이 반봉건 반식민지 사회에서 일어난 것이기 때문에, 생산력 증진을 통한 선진 생산관계와의 통일을 점진적으로 추구해야한다는 것이었다.

이 노선은, 계급모순은 이미 사라졌으며 다만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이 기본적인 것으로 되었다고 인식하였다.

이에따라 개인기업 경영, 토지재분배, 상품경제 등 문화혁명의 노선에서는 자본주의적인 것이라고 이해되었던 것들이 인정되었다.

이 입장에서는 마오와 같은 급진적 사회주의화는 조급한 쁘띠부르조아적 발상인 급진좌경노선으로 평가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생산력 증진을 중시하는 입장에서 보면, 문화혁명은 건설적이라기 보다는 파괴적이었고, 이성적이라기 보다는 열정적이었다.

이 열정은 기존에 부르조아적이라고 인식되었던 것에 대한 소아병적공포와 이에 따른 증오를 동반한 것이었다.

따라서 레닌(Lenin)의 문화혁명이 과학기술 증진과 부르조아 지식인들의 전문성을 존중한 것과는 달리, 문화파괴적 성격이 농후하였다.

이와 아울러 사회주의의 자본주의와의 비연속성만이 지나치게 강조되고, 연속성은 무시하게 되었다.

또한 그 혁명은 급진적이고 인위적이었기 때문에, 명령하달 식으로 사회주의적 정책을 실행하였다.

사회 영역은 정치 영역으로 흡수되었고 사회 영역이 정치 영역을 흡수하는 방식이 될 수는 없었다.

따라서 자발적·민주적이라기 보다는 중앙 집중식 관리체제가 사회를 지배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사회주의화가 사회화로 이해되지 않고, 국가화로 이해하는 풍조가 유포되었다.

그러나 제11기 3차 중앙위원회 전체회의(1978)이후 다시 생산력 증진을 중시하는 이론으로 복귀되었다.

왜냐하면 거대한 잉여가 있을 만큼 생산력이 발달해야 생산과 소비의 유기적 통일이 가능하고 공유제를 유지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이 노선의 주장자들은 자신들의 입장을 실사구시로서 이해하였다.

그리하여 이른바 사회주의 초급 단계론이 제기되었다.

이것은 사회주의국가는 탄생한지가 얼마 안되고 견고하게 확립된 사회구성체가 아니기 때문에, 자신의 매력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서 인지하였다.

여기에서 사회주의에로 가는 도정은 장기간(100~150년)의 산업화와 상품경제 발전을 통해 사회주의에로 진입하는 과정이라는 노선이 제기되었다.

특히 노동에 따른 분배, 노동 생산성 증대, 상품경제와 사회주의가 모순관계가 아님이 강조되었다.

따라서 그것은 국제질서에 관한 안목을 전환하였다.

즉 자본주의가 가지는 탄력성과 생산력 발전을 인정하게 되었다.

자본주의의 역사는 단지 350년이 지났을 뿐이므로, 앞으로 장구하게 발전할 것이라고 예견하였다.

이것은 맑스주의에 대한 도식적 이해 가운데 하나인, 빈곤화에 의해 최종적 파국에 도달한다는 자동붕괴론과 계급의 의지와 독재를 결부시키는 도식에서 탈피한 것이다.

이러한 안목의 전환은, 세계의 객관적 형세를 수용하는 견해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것이다.

그러나 제2의 물신화, 이성의 도구화, 노동력의 상품화라고 하는 위험성과 함께 사회주의국가 내의 관료주의에 주목하게 한다.

특히 중국의 경우 개혁의 노선이 주로 경제문제에만 치우치고, 자국내의 빈부격차와 관료주의 문제를 소홀히 하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이런 점에서 볼 때에, 개혁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사회주의이기 때문에 문제가 생긴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와의 올바른 연결실패에 그 시행상의 착오가 있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우리 인생의 미래를 전망하는데 있어서 관계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우리사회의 변혁운동의 과정에서도 이 문제는 거치지 않으면 안될 문제일 것이다.

이제 민주주의를 사회주의 이전 단계로 보거나, 어느 계급이건 그 독재를 위해 유보되어야 하는 것으로 간주하기는 어렵게 되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국가권력을「폭력의 독점」으로 정의하는 베버(Weber) 적 정치관을 그대로 답습하는 것이 될 것이다.

어제는 부르조아 독재, 오늘은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단순한 사고방식은 프롤레타리아를 민주주의에 대립시킴으로써 사회의 다양한 운동역량을 통일적으로 연결시키지 못하게 할 것이다.

진정한 민주주의로서의 사회주의는 고립된 개인의 자유와 평등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고 소외된 국가권력에 의한 시민사회의 국가화도 아니다.

그것은 집단의 질서와 운명에의 일반적 참여, 즉「연대적 사회화」를 의미한다.

그렇다면 이제 정치적민주주의를 사회·경제적 민주주의와 직접 결부시키고자 한 루소(Rousseau)적 견해가 발전적으로 재음미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해서 민주주의를 자유주의와 혼돈해서 정치영역을 개인의지에 의한 합의공간으로 보는 주의주의적 견해로 퇴보하는 것은 정치와 문화공간에 이미 자본가의 논리가 침투되어 있는 현실을 외면하는 것이다.

즉 사회이전적인 개인이 사회에 대한 인식론적 특권을 가지는 칸트주의에로의 복귀는 어려울 것이다.

또한 민주적 정치이론을 상실하는 관점인 정치를 경제로 흡수하는 극단적 계급주의 역시 민주주의를 자유주의로서 도외시하는 혼돈을 가져올 수 있다.

이것은 사회주의를 기존의 추상적 평등을 실제적 평등으로 대체하는 것이라는 단순논리와도 결부되어 있는 것이다.

인류가 직면했고, 해야 할 장구한 문제가 인간을 사물로 취급하는 것의 반복이라면, 개혁이 던져주는 한 문제인 관료주의는 새로운 이론과 행동으로써 극복되어야 할 것이다.

위의 논의의 맥락에서 본다면, 이 과제와 함께 현실문제의 해결은 민주를 요구하는 다양한 영역의 여러 저항운동과 노동계급의 운동을 어떤 방식으로 접맥시키며, 그 접맥의 구심점을 어디에 설정할 것인가에 대한 이론적 작업을 새로운 차원에서 수행할 것을 요구할 것이다.

또한 임금노동자의 다원적 구성에 따른 이해관계의 편차를 어떻게 노동자계급이 정치적으로 수렴해낼 것인가에 대한 이론적 뒷받침도 요구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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