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영빈 교수(일본어학 전공)

“비부 심상성 좌창입니다.” 병원에 가서 이런 말을 들으면 이제 죽었구나 생각할 사람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코에 여드름이 났네요”라고 하면 병원에 괜히 왔다고 생각할 것이다.

의약품 설명서·컴퓨터 메뉴얼을 보고 이해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언어가 때로는 차별을 유발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집단의 결속을 위해, 혹은 이익을 위해 어려운 용어를 일부러 사용하는 것이 그 예다. 전문용어는 정확한 개념을 전달해야 한다는 성격상 하나의 문자로 개념을 섬세하게 표현할 수 있는 한자를 결합해서 만들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한자 표기를 쓰지 않는 요즘, 한자에 의해 만들어진 전문용어가 문제가 됐다. 그래서 대한의사협회는 어려운 한자용어를 [頸椎(경추)→목뼈, 수장(手掌)→손바닥과 같이 알기 쉽게 바꾸고 있다. 얼마 전 ‘재일교포 2세의 아이덴티티’라는 제목의 글을 썼다. 쓰고나니 전문가 말이 요즘은 ‘정체성’이란 말을 쓴단다. 무식이 탄로난 것이다. 언어학자로서 알량한 오기가 생겼다. ‘정체성’이란 말을 들었을 때 ‘강변북로 정체’라는 도로 전광판이 생각났다. 그 다음 생각난 것이 “네 놈의 정체를 밝혀라”였다. 그러고 보니 ‘정체’라는 말이 긍정적인 의미로 쓰이는 경우가 드문 것 같다. 게다가 [∼성]이란 접사까지 붙으니 더 이상한 느낌이다. 이렇게 해서 자기 정당화는 완성됐다.

최근 야스쿠니 신사 참배로 물의를 빚고 있는 고이즈미 일본 수상이 정부 발행 백서에 외래어가 많아 국민이 이해를 못하니 알기 쉬운 말로 만들라고 지시했다고 한다.애국자인 것이다. 그래서 일본 국립국어연구소가 [인큐베이션→起業支援(기업지원)], [노말라이제이션→等生化(등생화)]란 말을 만들어냈다. 起業의 경우 발음이 같아 企業과 혼동되며, 等生化의 의미는 ‘모두가 평등하게 사는 사회의 실현’을 뜻한다고 하는데 문자를 아무리 봐도 뜻이 안 통한다. 한자에 중독된 일본어는 한자 표기를 봐도 그 의미를 파악할 수 없게 돼가고 있다. 애국심이 언어를 망치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용어 개정과는 사뭇 다르다. 필자는 대한의사협회 용어위원회 용어제정 작업에 참가하고 있다. 학생들에게 일본어 선생님, 혹은 송센세(선생님의 일본어)로 불리는 내가 의학은 모르지만 새로 만들어진 용어가 알기 쉬운 용어인지 아닌지를 대규모 언어 데이터를 써서 검증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일본어를 전공하면서 우리말을 다듬고 가꾸고 있는 셈이다. 유학하며 배운 것은 일본어 자체라기 보다는 언어에 대한 그들의 분석 방법이다. 이를 우리말에 적용하고 타당한 방법론을 만들어내는 것에 요즘 무한한 기쁨을 느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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