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학보사 17기 기자 문화세상 이프토피아 대표 박옥희씨

꿈에 시험지를 앞에 두고 땀을 뻘뻘 흘리다가 깜짝 놀라 깨는 일이 없어진 것이 한참 됐다.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에 다닐 때도, 그리고 아이 엄마가 돼서도 스트레스를 받는 일이 있을 때면 종종 이런 꿈을 꿨다. 남들은 ‘시험 보는 꿈을 꾼다’고 하면 내가 꽤나 학구적이고 모범적인 학생이었으리라고 짐작을 하지만, 대학생활을 되돌아보면 학구적인 학생하고는 거리가 멀었다. 대학교 1학년 2학기에 시작한 학보사 생활을 4학년 1학기까지 했으니 대학생활은 대부분 학보사와 관련된 것이다.

6.25 와중에 살아남은 까닭에 진지한 윗 기 선배나 착하고 모범적인 아랫 기 후배들과는 달리, 대부분 1950년생인 나와 동기들은 ‘논다’는 얘기를 들었다. 특히 정충량 주간교수나 학과 교수들이 그런 말을 많이 하곤 했다. ‘땡강’을 하자고 누군가가 제안하면 일사분란하게 강의실을 빠져나가 교수들을 곤혹스럽게 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기숙사 뒤쪽의 야산으로 가서 묵직한 가방 속에 책 대신 넣어온 버너와 코펠로 점심을 해먹은 적도 있었다. 지금만큼이나 그때도 잊어버리는 것이 너무 많았는데, 하루는 내가 담당하기로 했던 고추장을 까맣게 잊고 왔다. 그래서 학교 부지와 뒤쪽 민가 사이에 있는 철장너머로 아주머니를 애타게 불러내 얻은 고추장으로 찌개를 끓여 맛있게 점심을 해먹은 후에 큰 대자로 누워서 노곤한 오후를 보낸 적도 있었다.

유난히 잦은 휴교령으로 학내나 사회가 어수선했던 그 시절에는 청진동의 막걸리집과 명동의 카이저호프에서 우리는 불안과 울분을 담배연기와 함께 토해냈다. 당시 각 대학에서 학보사 기자를 하던 친구들은 학내 언론 자유에 대한 투쟁과 암울한 시대 상황에 대한 절망감으로 평생에 마실 술을 그 때 몽땅 마셔 버렸다. 매캐한 최루가스에 눈물을 흘리거나 연대생들이 후문으로 들어와 이화교 앞에 모여서 함께 데모를 하면 신문에 실리지도 못하리라는 걸 알면서도 사진을 찍고 취재를 했다. 그런 후에는 술과는 거리가 먼 친구까지도 취할 때까지 술을 들이키곤 했다.

명동의 옛 내무부 앞에 있던 카이저호프에서 시작해 빈대떡집과 OB캐빈, 그리고 클래식 전문다방인 크로이첼까지 훑으면 어김없이 아는 얼굴을 만날 수 있었다. 유난히 술이 고프고 주머니에는 집에 갈 차비 밖에 없을 때면 이 행로를 따라 가서 만나는 친구자리에 붙어 앉아 갈증을 풀곤 했다.

당시 괴로웠던 일도 30년이 지난 지금은 모두 그리운 추억으로 남아 있지만 이제 다시 학생이 된다면 그 때 휴교령으로 쓸 수 없었던 졸업논문도 쓰고 술도 멀리하며 발랄하게 대학생활을 보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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