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학보사 10기 기자 아주대 영문과 김설자 교수

`되돌아보면, 이화 동산에서 철부지처럼 지내던 4년의 많은 부분을 이대학보와 함께 지냈다. 1963년 봄 호기심에 이대학보사의 문을 두드린 이후 65년 봄까지 나는 일주일마다 학보에 실을 기사의 중압감에 시달리며 수업과 학보사 사이를 수없이 오갔다.

당시 이대학보는 주간발행이었고 4면밖에 되지 않았다. 그런데도 기사 쓰는 일에 항상 압도 당해서 내 삶은 일주일 단위로 짜여졌던 기억이 난다. 학보 편집과 목요일까지의 원고 마감은 주말에 서울 신문사에서의 조판으로 이어졌고 조판소의 요란한 소음 속에서 학보가 완성될 때까지, 월요일에 발행하는 학보와의 씨름이 마치 끝없이 이어질 것 같은 일주일이었다.

당시 본관 지하에 있던 학보사 사무실은 어두컴컴한 지하 복도를 거쳐야 닿을 수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오른편에 기자들의 테이블이 길게 이어져 있었는데 편집 회의가 열리거나 기사를 쓰는 몇몇 기자들이 모여 있었다. 그곳은 늘 불꽃 튀기는 듯한 언어의 경기장이었다. 기자들은 그들 특유의 날카로운 언어의 검으로 어떤 주제가 도마 위에 오르든지 그것을 능숙하게 다뤘고 그런 가운데 학보의 내용이 무르익곤 했다.

방학 때면 학보는 주간이 아니라 월간 정도가 됐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모든 학생들에게 학보를 우편으로 부쳐야하는 작업이 수월치만은 않았다. 일일이 신문을 접어서 주소 띠를 두르고 우표를 붙이는 일은 기계적이었으나 매우 많은 시간을 들여야 하는 작업이었다. 나는 그 와중에서 재치 있는 재담·험담·덕담 등 마치 ‘언어의 전시장’을 방불케하던 왁자지껄한 대화를 매우 즐거워 했다. 누군가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되받아치는 선후배 기자들의 언어 유희에 귀를 기울이고 눈물까지 흘리며 웃다보면 어느새 우리는 임무를 다 마쳐가고 있었다.

늘 학보사 사무실 중앙의 책상에서 학보사를 지키는 보루처럼 혹은 잔소리 많은 시어머니처럼 기자들을 챙겨주던 편집국장의 낯익은 모습을 비롯해 학보사의 여러가지 일들을 소리없이 해결해주던 간사들, 학보의 교정을 위해 늘 수고하던 선생님들의 미소어린 환대가 기사의 중압감으로 축 처진 어깨를 다소 가볍게 해주곤 했다. 당시 주간이던 고 정충량 교수는 엄하면서도 자상한 어머니처럼 기자들을 돌봐줬다. 이제 40년이 지나 돌아보니 그들은 찰스 램의 시에서처럼 ‘낯 익은 옛 얼굴’로 내 추억의 사진첩에 생생히 기록돼있다.

당시 이화동산의 길이나 잔디밭에는 이름이 없었다. 누가 제안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이대학보에서 여러 길과 장소에 이름을 붙이는 캠페인을 벌여서 대강당으로 오르는 ‘휴웃길’을 비롯해 이화 구석구석에 이름을 붙여줬다. 한 호의 3면에서 이것을 모두 소개했던 기억이 나는데 아직도 그 이름들이 대부분 이화 캠퍼스의 이정표로 쓰인다기에 뿌듯하고 신기할 따름이다.

강산이 변해도 네 번이나 변했을 긴 시간이 지났고 학보도, 또 기자들의 생활형태도 당연히 우리 때와는 많이 다를 것이다. 그러나 길 이름들이 여전하듯 옛 이대학보 시절 이화동산을 채우던 젊은 지성과 그것을 지면에 담아내려던 학보사 기자들의 정신은 여전히 그곳에서 하나가 돼 생동하리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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