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8년 이화대학의 첫 학기, 보수적이고 작은 규모의 여학교에 익숙해 있던 나에게 이화대학은 그 유명한 ‘신촌 바람’만큼이나 사람을 움츠러들게 하는 이방 지대였다.

우선 광화문에서의 ‘신촌 뻐스’ 타기는 오늘 하루의 모진 대학생활을 예고하는 전주곡이었다.

신촌역 철길을 건너 교정으로 들어서면 이정표 하나 없는 그 광활함. 하필 내가 가야할 그 건물은 왜 물어보는 사람마다 모른다고 하는지, 천신만고 끝에 숨이 턱에 차 강의실로 들어섰을 땐 이미 교수는 강의를 시작하고 있었다.

수강신청 때는 모든 정보(교수가 학점을 후하게 주는지와 같은)를 종합해 정신 바짝 차리고 종합 시간표에서 수강해야 할 과목을 찾아내 ‘로열 시간’대로 꿰맞춰야 한다.

만약 성공하지 못하면 하루 2∼3시간씩 공강이 생겨 한 학기 일정은 엉망이 되고 만다.

매사에 한 발 늦고 얼띤 나지만 무슨 재주로 이 치열함에서 예외일 수 있으랴. 온갖 꽃들이 흐드러져 현란한 캠퍼스를 누비는 8천여 여성군(群)들의 재기 발랄함은 그 구체성을 떠나 나의 왜소함을 불필요하게 확대·확인시켜주는 미필적 고의의 공격성을 잠재하고 있었다고 할까. 아무튼 나의 재학생활 첫 학기는 대충 이렇게 썰렁했다.

헬렌관으로 이름 지어진 당시 중앙 도서관 2층의 잡지 열람실은 이처럼 주눅이 든 내게 신경 안정제와도 같은 곳이었다.

모든 종류의 학술·교양 정기 간행물과 신문, 전국의 대학 신문들은 한 호도 거르지 않고 골고루 갖추고 있었다.

휴·공강시간이면 도망치듯 이곳으로 빠져드는게 그나마 작은 즐거움이었다.

여름 방학을 끝내고 시작한 2학기 첫 주 어느 날, 나는 이곳에서 처음으로 ‘이대학보’를 발견했다.

학보를 펼치자 1면 중간의 ‘학생기자모집’이라는 사고(社古)가 첫 눈에 들어왔다.

내 인생의 절반을 바꿔 놓는 운명과의 조우였다.

시험 과목은 기사 작성·상식·면접 등이었고 1∼3학년 모두에게 응시 자격이 주어졌다.

무엇보다 매력적인 것은 ※표 밑에 부연한 ‘수당있음’이라는 항목이었다.

최종적으로 3학년 4명, 2학년 1명, 1학년 4명 등 모두 9명의 기자를 선발했고 그 중 나도 말석에 끼는 행운을 안게 됐다.

‘이대학보 공채 1기’는 이렇게 해서 탄생했다.

당시 학보는 월간이었으나 학생 기자로 구성된 편집진 등 구색이 갖춰지자 격주간으로 간행됐고 1년 후엔 주간으로 승격되는 초고속 성장 과정이 이어졌다.

지면의 성격도 1면 보도·2면 학술·3면 학생문화·4면 문예 등으로 정착했고 59년 여름방학엔 강원도 오지로 봉사활동을 나가는 계몽대·무우촌진료·전도대 활동을 현장 취재하는 특파원을 이대학보 최초로 파견하기도 했다.

이 기간동안 한국 현대사는 4·19와 5·16으로 역사의 큰 흐름이 바뀌고 있었고 그 한복판에 있던 대학도 예외는 아니었다.

박마리아 부총장일가 자살사건, 혁명 정부의 사립대 총장 정년제 실시로 갑작스럽게 거행된 김활란·김옥길 총장의 이·취임, 휴교와 속강의 반복, 김옥길 총장의 교수 30% 해임 파동, 정치 교수의 강제 해직, 교복입기 캠페인 등등 우리들은 숨가쁜 ‘빅 뉴쓰’를 쓰느라 헉헉댔고, 모르는 사이에 나의 잔뼈도 굵어지고 있었다.

참, 기사 마감 후 시켜먹는 ‘회빈장’ 잡채밥은 지금 생각해도 꿀맛이었다.

저작권자 © 이대학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