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학보 창간 50주년은 내게 특별한 감회를 안겨준다.

1951년 9월, 부산에 위치한 가교사의 첫 입학생인 우리는 3학년 2학기인 1953년 9월에 비로소 지금의 이화여대 캠퍼스 땅을 밟았다.

6·25사변으로 파괴돼 황폐한 당시의 서울은 재건·수리·복구가 시급한 과제였고, 학생들은 책이 귀해 숙제를 하려면 국립중앙도서관을 찾아야만 했던 어려운 시기였다.

그렇다고 지금처럼 과외 활동을 할만한 환경도 아니었다.

3학년 2학기 말 어느 날, 영문학 개론시간으로 기억된다.

강의를 마친 이석곤 교수는 “학교 신문을 내려고 하는데 참여하고 싶은 사람은 손을 들어보라”고 하셨다.

그러나 희망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그 다음 시간, 선생님은 학생 몇 명을 호명해 소집하고 신문내는 일에 적극 참여하도록 명령했다.

이것이 이대학보와 인연을 맺게 된 동기로 국문과와 영문과 학생 5∼6명이 기자 생활에 들어가게 됐다.

기자에게 필요한 기본 지식도 없이 우리는 5대학 18개 학과를 분담해 기사거리를 수집하기 시작햇고, 학생식당이었던 그린하우스(옛 영학관)에서 기사를 쓴 후 선생님께 제출했다.

고쳐 쓰기를 몇 번 되풀이하면 공책 장수가 확 줄어들었다.

모인 기사의 표제와 편편집은 선생님의 몫이었고 조판·인쇄는 서울 신문사에서 했다.

깨알같은 글씨를 골라서 기사판을 짜는 식자공의 신속한 솜씨가 놀라웠고 한 게라(활판 인쇄에서 조판에 놓은 활자판을 담아두는 나무상자)의 교정을 마치는데 2차·3차 교정작업까지 거쳐도 오자를 놓치는 우리들의 실력은 너무나 실망스러웠다.

타블로이드 4면짜리 이대학보 창간호 조판이 겨우 끝났을 때 사건은 발생했다.

기사가 모자라 공간이 생긴 것이었다.

지금도 이대학보 제1호 1면, 유달리 큰 사진을 보면 우리들의 난감했던 모습이 눈 앞에 선하다.

50년전 이처럼 힘들게 탄생시킨 창간호 이후 경험이 거듭됨에 따라 차츰 요령도 생기고 교정 실력도 발휘할 수 있게 됐다.

우리들은 현장 실습의 중요성을 실감하고 더 열심히 배우려고 노력했다.

오늘날 1237호를 돌파한 이대학보는 7개 부서에 34명의 기자들을 거느리는 훌륭한 대학 신문으로 성장했다.

앞으로도 계속 발전해 시대를 앞서가는 신문으로 이화인과 이 나라, 그리고 세계인을 위해 건전한 여론을 조성할 수 있는 큰 신문이 되길 기대해 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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