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두발로 걷고 언어를 사용하며, 성취동기를 가지고 있고 理性과 복잡한 생각을 할 수 있는 고등한 지능을 가지고 있어 만물의 영장이라고 한다.

진화의 역사 속에서 인간은 호기심을 가지고 주변을 탐색해왔으며 각종 생존전략을 발달시켜 왔다.

지금 우리의 모습은 진화의 산물이며 적응의 결과다.

일반적으로 자기가 처한 상황을 신속·정확하게 파악하고 적절한 행동으로 유연하게 대처하는 능력을 적응능력이라고 한다.

우리가 접하는 환경은 전보다 훨씬 복잡해지고 빠르게 변하고 있어 최근에 이르러 적응적인 인간의 능력이 더욱 강조되고 있다.

학자에 따라서는 이러한 상황적인 적응능력을 지능의 핵심적인 요소로 평가하기도 한다.

인간의 생리적, 신체적 기능이 그러하듯 적응능력은 모든 생명체가 가진 순수한 특성이다.

그러나 고도의 테크놀로지로 특징지어지는 현대사회에서는 자연스럽고 순수한 적응능력이 의도적인 것으로, 또는 불순한(?)것으로 변질돼 가고 있어 ‘적응적 행동이란 어떤 것인가? 적응적 인간이란 어떤 모습인가? 과연 적응적인 행동이 소중하게 인식돼야 하는가?’ 라는 근본적인 의문에 부딪히게 된다.

어떤 것이 나에게 더 유리한가? 손익계산을 하고 내게 유리한 행동이면 사회질서나 원리원칙, 인간으로서의 도리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행동하는 모습을 자주 보게 된다.

이러한 경우를 접할 때마다 아동학을 연구하고 부모됨이나 부모역할의 중요성을 가르치는 사람들은 간혹 ‘티없이 순수한 아이들에게 어떤 것을, 어떻게 가르치는 것이 이 시대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적응적인 아이로 길러내는데 도움이 되는가’하는 딜레마를 겪게 된다.

원칙대로 사는 것, 질서를 지키며 사는 것, 무엇보다도 인간으로서의 도리를 중요시하라고 가르치는 것은 그야말로 이 시대 적응에 뒤처지는 발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는가? 남보다 한발 앞서 눈치껏 생존 전략을 짜는 것도 중요한 적응능력일 수 있다.

다른 사람의 속내를 미쳐 알아채지 못하고 순진(?)하게 다른 사람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거나 나와 같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단순하고 눈치없는 사람은 소위 ‘왕따’를 당하는 세상이다.

급변하는 세상에서는 변화해야만 살아남는다.

그러나 힘을 행사하는 사람 앞에서는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할 수 있는 사람, 남보다 앞서가기 위해서 필요에 따라 엄연한 사회질서나 도덕, 기본적인 양심이나 인간으로서의 도리쯤은 언제든지 버릴 수 있는 사람, 이러한 사람들이 가진 유연성을 진정 고등수준의 적응능력이라고 할 수 있는가? 상황에 맞게 유연하게 행동하기 위해서 원칙이나 질서, 도리는 잠시 잊어버려도 된다는 얄팍한 적응능력이라면 차라리 그러한 적응력은 없어도 된다고 말하고 싶다.

인간은 오묘한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지 않는 범위 내에서 생존해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아무리 시대가 변해도 변하지 않는 것을 진리라고 일컫던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속성 중 진실함과 성실함 그리고 인간으로서의 기본적인 도리나 자연의 이치를 무시할 때 우리의 삶은 황폐해 질 것이다.

안으로 나를 채우려고 애쓰기보다는 겉으로 나를 내보이는 사람이 더욱 설득력 있는 이 사회, 내 생각을 아무 거리낌없이 표현하는 것이 새로운 덕목으로 치부되는 이 시대에서도 변하지 않는 진리 중 하나는 우리가 처한 상황을 ‘영리하게’가 아니라 ‘지혜롭게’ 보며, 自己愛에 빠져있는 나의 부족함을 볼 줄 아는 혜안을 가져야 한다.

인간이 진정 만물의 영장이라면 적어도 지금보다는 좀 더 겸손해져야 한다.

우리는 우리보다 미미한 다른 동물들로부터 보다 순수하고 진실된, 겸손하고 성실한 삶의 자세를 배우게 된다.

얼마 전 뉴스에 보도되었듯이 사랑하던 주인을 잃게 된 어느 진돗개의 눈물겨운 무언의 우직한 행동은 화려한 말을 세련되게 구사하고 복잡한 사고를 하는 우리 인간들에게 진정으로 가치있는 것이 무엇이며, 영원한 삶의 자세가 어떤 것인지를 일깨워 주는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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