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이맘때쯤 국제대학원 재학생들과 함께 "세계를 움직인 12명의 여성"이라는 책을 냈다.

2차대전 이후 여성 수상과 대통령은 모두 40명 가량이 되는데 그중 선거에 의해 당선된 사람만도 20명에 달했다.

우리는 그 중에서 자료수집이 가능했던 12명에 대한 전기를 책으로 엮었다.

책을 낸 이유는 최고 여성정치가를 소개함으로써 여학생들이 어려서부터 정치에 관심을 갖고 역할 모델로 삼아 정치가라는 직업을 일찍부터 준비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당시 내 수업을 듣고 있던 K라는 한 정외과 지망생이 내 연구실로 찾아왔다.

K는 말을 잊지 못하고 울먹이기만 했다.

나는 혹시 수업시간에 K에게 실수를 한 것이 아닌가 걱정이 되어 어찌할 바를 몰랐다.

감정에 복받쳐 눈물만 흘렸기 때문에 내가 생각할 수 있는 모든것을 대면서 K와 스무고개를 하는 수 밖에 없었다.

몇가지 그럴듯한 이유를 짚어보아도 K는 옆으로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기만 했다.

"여성지도자 책을 읽고 감동을 받아서 우는거니?"하는 장난기 어린 나의 질문에 드디어 고개가 앞뒤로 흔들렸다.

나는 미처 기대하지 못했던 답변에 잠시 멍했지만 이내 뜨거운 것이 가슴으로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감정을 추스린 K가 더듬더듬 내게 전해준 말은 이런 것이였다.

K는 어려서부터 정치가가 되는 것이 꿈이었다.

그런데 그런 꿈을 이야기할때마다 K의 아버지는 "여자가 무슨 정치냐"며 반박을 주기 일쑤였다.

그래도 미련이 있던 K는 정치학을 전공할 생각으로 사회대에 진학했으나 아버지의 꾸지람은 갈수록 도가 더해 K는 거의 포기 상태에 이르렀다.

그러던 중 여성지도자에 대한 책을 접하고 여성이 정치를 해야한다는 강의를 듣게 되어 자신의 꿈을 펼칠수 있다는 기쁨으로 나를 찾았던 것이다.

K는 자신의 정치를 하게되면 든든한 후원자가 되어준다는 약속을 단단히 받고 나서야 자리를 일어났다.

K와 같이 고귀한 꿈이 좌절 당했다거나 혹은 아직고 정치를 외면하고 있는 이화인이 있을까봐 내가 늘 강의시간에 외치던 "여성이 정치를 해야하는 세가지 이유"를 다시한번 강조해야겠다.

첫째로, 인간은 정치적인 동물이다.

이는 정치를 하지 않고서는 여성이 하나의 인격체로 완성되기를 기대해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그 동안 여성이 사적인 영역에 머물고 남성은 공적인 영역을 담당하는 역할분담을 통해서 정치는 공적 영역에 한정되었다.

따라서 정치는 남성의 전유물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국가의 역할이 확대되면서 과거에 개인적인 문제로 간주됐던 사소한 문제들이 이제는 모두 정치적인 문제가 되었다.

직장내 성희롱, 가정폭력, 아동확대와 착취, 동성동본 금혼, 삼풍백화점 붕괴, 인천 호프집 화재 등등 우리의 하루하르 생활중에 정치와 연결되지 않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개인적인 것이 바로 정치적인 것이다.

" 둘째로, 여성의 이익은 여성만이 대변할 수 있다.

인간의 상상력은 자신이 경험해보지 않은 것에 대해서 동정심을 발휘하는데 한계가 있는것 같다.

아무리 페미니스트를 자처하는 남성도 결코 여성의 문제를 진심으로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수도없이 느꼈으리라. "당신이 어떤것을 믿는다면 정치로 들어와라. 그것이 정치에 입문하게 되는 유일한 이유다.

" 영국의 전 수상 대처가 한 말이다.

셋째, 화합과 포용으로 상징되는 여성의 정치는 그 동안 대립과 갈등으로 점철된 남성 정치에 대한 새로운 대안이다.

여성이 정치에 참여해도 정치가 지금까지 행해졌던 것과 전혀 다를바가 없다면 굳이 여성이 정치를 해야할 필요가 없을지도 모른다.

다행스럽게도 최근 리더쉽 이론은 여성리더쉽을 탈냉전 시대에 적합한 새로운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다.

"시대가 여성을 부른다" 노르웨이 전 수상이자 현 세계보건기구의 사무총장인 브룬틀란트의 말이다.

그 동안의 정치는 엄밀하게 말해서 국민이 정치의 주체가 되었다기보다는 소수의 통치자에 의해 좌지우지 되었다.

통치논리가 정치를 지배했던 것이다.

그래서 정치에 대한 국민의 환멸과 불신이 말할 수 없이 깊었다.

하지만 점점 정치의 장이 확대되는 민주사회에서 "정치는 더러워"라는 말은 자기 얼굴에 침을 뱉는 것과 다름없다.

게다가 여성이 직업 정치인이 된다면 정치가 지금보다는 한결 나아징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다.

"여성은 소수에 속했기 때문에 남에 대해 이해심이 많고 남의 이야기를 들을 줄 압니다.

남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정치에서 가장 중요합니다.

" 아일랜드의 대통령을 역임했고 현재 유엔 인권위원회와 고등판무관으로 있는 로빈슨의 이야기다.

여기에 한가지 실질적인 이유를 덧붙이자면 정치는 여성에게 있어서 바로 틈새시장이다.

여성국회의원이 3.7%밖에 없다는 사실은 무궁한 잠재적 시장이 여성의 진출을 기다리고 있음을 단적으로 말해준다.

기업에서 여성을 뽑아주지 않는다고 불평하지 말고 새천년에는 "정치인"이라는 새로운 직업을 준비하자. 조기숙 교수(*국제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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