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성 찾아볼 수 없는 자본주의의 반영 올 1994년은 「서울정도 6백년」이 되는 해이다.

도대체 우리가 살고 있는 서울의 진정한 모습은 무엇일까. 우리는 어떻게 움직이는 도시에 살고 있으며, 그속에서 얼마만큼의 영향을 받고 영향을 줄 수 있는가. 단면적으로나마 삶의 터전인 서울의 실상을 파악함으로써 우리 생활의 모습을 읽어보기로 하자. <편집자> 「일상생활」이라고 우리는 우리의 삶을 표현한다.

이는 똑같은 삶의 반복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오늘은 결코 어제와 같지 않다.

우리를 둘러싼 자연환경이, 생활환경이 어제의 연속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한 다른 모습들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정도 6백년을 한결같이 한 국가의 심장부 노릇을 했지만 그 도시 또한 매일 변화하고 있다.

우리의 주거공간을 보았을 때 변화를 제대로 인지하지 못할 뿐인 것이다.

끊임없이 확대되어 나가는 도시, 서울은 해방 이후 많은 양적인 변화를 겪어왔다.

「한강의 기적」이라 불리는 급속한 경제성장을 거치면서 인구는 1천만을 넘어섰다.

4대문안의 공간에서 이제는 신도시로까지 연결되는 행정구역상의 변화, 이것에서 우선 거대한 서울의 변화를 읽는다.

그러나 서울은 단순히 양적인 변화만을 겪는 것은 아니다.

질적인 변화 또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6,70년대의 경제성장을 거치면서 성장의 도시로서, 많은 인력들이 한국의 경제를 주도해나가던 도시에서, 이제는 자본주의의 과잉소비를 창출해내는 소비도시로 서울은 변화하고 있다.

여기에서 서울의 질적인 변화를, 겉으로 보기에 발전적인 서울의 이중성을 발견한다.

이대 후문에서 독립문 쪽의 버스를 타면 금호터널과 사직터널을 고가도로가 연결하고 있다.

그 고가도로에서 버스의 오른쪽은 영천동이라는 지역이다.

지금 그 곳은 아파트 공사를 위해 붉은 토양이 잔뜩 파헤쳐지고 중장비가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다.

공사의 규모를 보아서 어마어마한 아파트 단지가 또 하나 늘어서리라는 것을 상상해 볼 수 있다.

그 버스의 왼쪽편에는 현저동이란 지역으로 오밀조밀하게 집들이 들어서서 그 옆의 공원과 대조를 이루고 있다.

(물론 이 직역도 재개발 지역으로서 철거당하고 있기에 곧 영천동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게 될 것이다) 영천동의 개발모습은 내게 서울의 이중성에 대하여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93년 빈민연대활동으로 영천동을 들어갔을 때의 모습이 내게 생생하게 기억나기 때문이다.

「투쟁하는 철거민이 철거에서 해방된다」며 웃으시던 아주머니들의 모습, 철거반원들이 공포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 허물어놓은 집터에서조차 환히 웃으며 뛰어놀던 아이들의 모습이 영천동의 개발과 항상 겹쳐진다.

그 곳에서 만났던 아주머니들은, 밝게 웃으며 장난치던 아이들의 모습은 영천동에 새로이 아파트가 들어서도 그 곳에서 찾을 수 없다.

그 아이들을 만날 수 있는 곳은 다음 철거지역으로 지정된 또 다른 재개발지역 뿐일 것이다.

이러한 서울의 재개발 계획은 과연 서울이 어떻게 재편될 것인가를 드러내 보인다.

이 곳에서 가난한 서민의 생활은 전혀 보장되지 않는다.

자본의 극대이윤창출이 있을 뿐이다.

서울시 재개발 계획에서는 재개발 지역의 영세민에게 영구임대주택을 제공할 것을 명시하고 있다.

그러나 현재 재개발 과정에서 영세민의 권리는 온데 간데 없다.

오로지 건설회사가 최대이득을 보기 위해서는 최소 30평, 최대 50평의 아파트를 짓는 길 뿐이다.

이에 10평 정도의 아파트를 지어 영세민의 권리를 보장한다는 것은 자본의 논리에 어긋날 뿐이다.

그래서 철거민들은 자신의 권리를 찾기 위해 투쟁한다.

그러나 대다수의 철거민들이 몇 푼의 이주비를 받고 철거촌을 떠난다.

당분간 살기 위한 다른 철거촌으로…. 서울의 이중성은 구로공단에서도 나타난다.

경제성장의 중추적인 역할을 했던 곳, 많은 노동자들의 피와 땀이 서린 구로공단은 이제 서울에서 더이상의 의미를 갖지 못한다.

서울이 더이상의 의미를 갖지 못한다.

서울이 자본주의의 소비도시로서 자리잡게 된다면 생산을 퇴색되어갈 수 밖에 없다.

구로공단에서는 이전처럼 활기찬 기계가동 소리를 들을 수 없다.

활발하게 생산품을 생산하던 많은 공장들이 보다 유지비가 적게드는 성남 등의 서울의 주변도시로 이주해간다.

또한 대기업과의 경쟁에서 진 많은 중소기업들이 공장문을 닫는다.

이로 인해 구로공단은 점차 그 주거인구가 줄어들고 있으며 공동화되어간다.

이러한 현상은 서울의 중심부 역할을 해왔던 세종로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광화문, 종로일대에는 많은 사람들이 주간에 빌딩들을 메우지만, 저녁이면 모든 빌딩에서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서울의 공동화 현상. 그것은 뉴욕의 슬럼가가 어떻게 형성되었는가를 기억나게 한다.

한때는 도심지로서 활발했던 뉴욕의 슬럼가가 공동화 형상으로 인해 부랑자들과 흑인들이 거주하게 되면서 지금의 모습으로 정착했다는 이야기가…. 한편 고시 반대편에서는 어떠한가? 목동, 일산, 분당 등 신도시를 건설하면서 서울은 계속적인 팽창을 꾼꾼다.

그러한 팽창에는 아파트만이 가듯할 뿐이다.

일단 아파트가 완공되면 서둘러 입주권을 내준다.

버스정류장이나 여러 편의 시설은 차차들어서면 되는 것이다.

주간생활은 결국 도심지에서 하기때문에 야간 생활을 하는 아파트는 당분간 문화적 시설이 없어도 서울 행정에 큰영향을 끼치는 것은 아닌 것이다.

단지 많은 아파트 입주자들의 불편함이 있을 뿐이다.

이것이 현재 서울시민의 삶이다.

이러한 주거생활과는 대조적으로 서울은 소비문화를 창출해내는 지역을 가지고 있다.

압구정 로데오거리, 방배동 카페골목, 새로운 카페문화가 들어서 있는 홍대앞 등…. 문화생활을 영위하는 것이 아니라 문화 또한 소비하는 자본주의의 속성을 이들은 다른 서울의 지역을 대표하여 보여주고 있다.

서울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는 발전이 아니다.

단숭한 양적 팽창에서 그치는 것이 아닌 따스함을 찾아볼 수 없는 자본주의의 반영으로 자리잡을 뿐이다.

도시의 어느 곳에서도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는 찾아볼 수 없다.

서울시민들의 생활은 서울의 음지와 양지 속에서 이원화되어 가고 있다.

한쪽에서는 성장정책의 희생자들이 서울의 음지속에서, 자신이 들어설 공간에서 쫓겨나고 있으며 한쪽에서는 공간자체를 기호의 소비지로 만들어 사용하고 있다.

또한 서울의 지역기능 분화에 따라 낮에는 도심지, 밤에는 서울의 주변부로 그 생활이 이원화되고 있다.

도시의 변화, 그것은 단순히 건물의 변화는 아니다.

그러한 건물의 변화에 맞추어, 지역의 기능 변화에 맞추어 그 안에서 생활하고 있는 인간들도 변화하는 것이다.

화려함과 대비되는 버려진 도시의 한구석, 그곳에는 우리와 똑같은, 또다른 서울시민이 존재한다.

자본주의 소비문화의 중심지로 자리잡고 있는 서울이, 자본주의에서 소외된 철거민들을, 노동자들을 구원할 것인가? 과연 서울은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라는 허울 속에 발전할 수 있을까? 아니다.

내가 할 수 있는 대답은 그것뿐이다.

철거촌 속에서 바라본 서울의 하늘은 너무나 어둡다.

이제 신촌의 거리에 있는 이화인에게 묻고 싶다.

서울은 지금정도 6백년이라는 이름이 무색하지 않은 발전을 해왔는가? 이 질문에 대답하기 전에 자신의 눈은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살펴보자. 만약 자신의 눈이 이화안에만, 신촌에만 머물고 있다면 눈을 조금만 더 들어보자. 우리가 살고 있는 서울을 좀 더 큰 눈으로 바라보자. 서울이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지, 그 안에 어떻게 개입할 것인지 끊임없이 생각하고 함께 움직이자. 정외과4 민대숙 성장정책이라는 미명아래 이루어진 서울의 단순한 양적팽창은 화려한 소비도시와는 대조적으로 소외된 철거민·노동자들을 양산하고 있다.

<사진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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