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 22일 아침 9시 40분쯤, 나는 「공간과 환경」이라는 잡지사의 현장취재 안내를 위해 우리집이 있는 역삼동을 떠났다.

일행은 편집부 차장이라는 김인숙 기자와 경규관이라는 아주 어려운 이름을 가진 젊은 카메라맨 그리고 조수노릇을 맡은 김모군이였다.

우리가 가는 목적지에는 「화음동」이라는 내가 1980년 부터 발굴조사하고 있는 유적지가 있고 이번 답사는 아홉번째였다.

이곳은 곡운 김수증(1624-1701)이라는 선비가 1668년 춘천을 거쳐 평강현감으로 부임차 이곳을 지나면서 지금 위치보다 2.4 km쯤 하류에 있는 용담동이라는 곳을 보아두었다.

그는 1670년부터 집을 짓기 시작하고 1675년에는 가족을 거느리고 들어와 곡운정사라고 이름짓고 살다가, 1689년 이른 바 기묘사화라는 서인과 남인간의 당쟁에서 서인이 패하자 서인이였던 그는 성천부사를 그만두고 산속깊이 들어가 음의 세력이 성하는 시대에 대처해 은거하던 곳이다.

김수증은 이곳 산수 좋은 골짜기에다 부지암, 한래왕교 등의 이름을 가진 집과 정원을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서쪽 부지암에서 한래왕교라는 다리를 건너 너럭바위에 태극도, 하도곡서, 복의팔괘, 문왕팔괘를 새겨놓고 인문석이라고 이름 붙이고 또 바로 옆 삼일정이라는 바위에다가 정자를 지은 다음 이 정자의 기둥, 석가래등에 태극, 양의, 사상, 팔괘 등을 그려 놓고 가끔 그곳에 올라서 인문석을 바라보면서 자연과 인간세상의 변화법칙을 굽어 살피던 곳이다.

이 은거처는 북송때의 소강절이라는 성리학자가 도사들이 연구하던 상수역학을 좀더 체계적으로 발전 시켜놓은 「음양소식관」이라는 자연관에 따라 축조한 우리나라에서 한곳밖에 없는 별난 구조를 가진 정사이다.

위에서 말한 상수역학이란 주역의 괘효를 기호와 수리로 설명하는 옛날 성리학자들이 필수적으로 알아야 할 분야로, 요즘 말로 하자면 기호 논리학에 해당된다.

나는 이 진귀한 유적이 우리 문화사에서 중요한 현상의 하나이고 또 오늘날 성리학이나 역사상을 연구한다는 학자들도 이에 대한 관심이 거의 없는 터라 이곳을 사적지로 지정해서 남은것이라도 보존해 보자는 뜻에서 문화재위원회에 두번 지정신청을 했다.

지루한 기다림 끝에 문화재관리국으로부터 내가 받은 통지서는 대개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다.

『가보았더니 글자 몇개 안되는 별볼일 없는 것이므로 지방문화재로 하는 것이 좋겠다』 이렇게 해서 정작 전문가인 나의 증언이나 조사동참의 기회는 한번도 주어지지 않고 문화재위원들의 자의대로 유적의 가치가 강등되었다.

이 유적은 그 후 한참 방치되었다가 1990년에야 화천군에서 겨우 지방기념물로 지정이 되었다.

그런데 내가 제 7차 답사를 갔던 1989년 6월 11일에는 유적지의 서쪽 골짜기에 물고기를 길러 회집을 짓겠다는 속물들이 벌써 작은 댐을 쌓고 있었다.

그때 화천군청 공보실 직원이 우리와 함께 있었지만 말한마디 못하고, 나도 몇마디 투덜댔지만 참담한 마음으로 파괴되는 골짜기를 바라보고만 있을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몇년전 홍수로 겨우 지탱해오던 계곡 둑 축대도 무너지고 황폐되어갔다.

이러한 조직적 파괴는 지금까지 군사지역으로 보호받던 계곡이 민간출입통제가 해제되자 가속화되고 있다.

금년에는 화악산 정상부근 까지 화천군 쪽은 아스팔트가 깔리고 주말이면 자가용탄 저돌적 행락객들이 들이닥친다.

이러한 자연파괴는 경치 좋고 놀만한 곳이면 웬만한 전국의 골짜기마다 사정은 다 마찬가지여서, 자리세 받아먹고 보신탕이나 가짜 토종닭 장사들의 이기심과 몰지각한 인간들의 소비문화병으로 금수강산이 온통 병들어가고 있다.

이렇게 아득히 깊은 상수원지에서부터 오염이 돼 가는데도 지방공무원들은 포크레인을 몰고 산골짜기로 들어가는자를 발견해도 서로서로 연줄이 닿는 사돈에 팔촌이라 고개 돌리고 눈감아버리고, 건설부와 환경청은 일터지면 서로 내 소관이 아니라니 한편에서 환경정화운동 열심히 해도 어찌 당할 수 있으랴! 이번에 방문한 화음동은 몇년 새 일변해서 더욱더 발전한 것이 역력했다.

수천년 내려오던 초가집도 줄어들고 냇가를 따라 벽돌 이층집이 늘어가는데, 시골사람 잘사는 형편 누가 마다하리오마는, 몇만년 맑은 물에 씻겨 곱고도 묘하게 다듬어져, 저 헨리 무어의 조각보다 더 아름다운 계곡안 자연석들이 불도저로 밀어붙여지고, 흐르는 계곡물은 시멘트로 칸막이서 수영장을 만들어 놓으니, 탐욕에 가득찬 자가 용족들 강산이야 어찌되든 우선 실컷 먹고 마신 다음 찌거기며 빈깡통, 남은 음식, 담배꽁초를 아무데나 내버리니 아이고 어메 워쩔낀고! 다음 우리가 간 영당동은 1701년에 김수증 선생이 돌아가신 뒤에도 한동안 안동김씨네 후손들이 사당에 영정을 모시고 제사를 받들었기 때문에 지금도 영당동이라고 한다.

백부 곡운선생의 은둔사상을 좋아하여 역시 영당동에 곡구정사라는 집을 짓고 살았던 17세기의 유명했던 학자 삼연김창억은 1722년 2월 21일 그가 숨을 거두기 직전에 임종하던 아들 양겸과 노비두발에게 『장차 병난이 있을 것이니 이 곡운의 은거지를 지켜라』고 유언했다.

그러나 1945년 36년 만에 해방이 되면서 바로 화악산 정수리가 38도선으로 나뉘고 인민군대가 사창리에서 화천으로 통하는 도로를 확장해서 군사도로를 만들고, 1953년 휴전 무렵 평강지역을 서로 장악하기 위해 이곳에서 남북군대 사이에 큰 전투가 벌어졌었다.

서울로 돌아가는 길에는 처음으로 통금이 풀린 화악산을 바로 넘어가기로 했다.

금방 아스팔트공사가 끝난듯한 횡단로는 화악산 정상과 응봉이라는 1436M의 중간을 거의 다 올라가다가 갑자기 긴 터널을 빠져나가야 한다.

우리 모두 차로 굴속을 들어가니 이건 아주 칠흑 같은 어두움이여서 전조등을 켜도 보이는 것이 없어 이 세상을 떠나 다른 우주로 가는 기분이다.

한참 그러고 가다가 마침내 콩알 만한 빛이 보이고 그것이 점점 커지더니 광명과 함께 새로운 천지가 전개되는데, 책을 읽으면서 상상만 해보던 블랙홀이란게 바로 이런 것이겠구나 속으로 생각한 것이 나만이 아니였다.

그날 오전 화음동에서 개운치 않던 기분을 저 세상에 접어두고 신천지, 아니 신우주에 환생한 느낌이니, 사람이 살다 죽는게 이렇게 신비한 체험이라면! 그런데 요즈음 유 모라는 대학교수가 쓴 답사얘기 책이 벌써 몇달째나 인기 절정에 있는데 그 이유가 전문가가 아닌 대중들에게도 우리 문화를 접할 수 있도록 쉽고도 달리는 말에 채찍질하듯 써내려간 그 문체 때문이 아닌가 생각하면서, 한편으로는 우리 자연환경이나 문화유산에 대한 지식과 호기심을 자극해서 온통 전국토가 더렵혀지지 않을까 걱정이 된다.

그러나 누구나 문화와 쾌적한 휴식시간을 공유할 자격이, 마치 모든 이에게 운전 면허증을 취득할 권리가 있는 것과 똑같으니, 사람답게 사는 권리와 환경오염이라는 역기능이 어떻게 상충하지 않게 할 수 없는 것일까? 동양화과 교수 유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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