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학번에게의 91년 4월 지난 4월 26일(화)명지대에서 강경대열사의 3주기 추모식이 있었다.

단상에 앉아있는 경대의 부모님과 누나를 보면서, 그 자리에 앉아있는 사람들을 보면서 많은 생각이 들었다.

「벌써」라는 말을 붙이기엔 너무 이른 시기일지 모르지만, 벌써 3년이 지나버린 91년 4월이 머리를 스쳐갔다.

많은 사람들에게 91년이 기억속에 남아 있겠지만, 91학번에세 91년의 기억은 남다를 것이다.

3년전 4월, 대학에 갓들어온 새내기였던 나는 지방에서 온 학생들이 대부분 그러하듯이 중간고사가 끝나자마자 오랜만에 집에 내려가 있었다.

그런데, 어느날 뉴스에서 「한 대학생이 폭력시위중에 심한 부상을 입고 병원에 옮겼으나 곧 사망했다」라는 얘기를 들었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그 뉴스를 듣고서도 별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저 「또한명의 대학생이 죽었구나. 왜 시위를 그렇게 폭력적으로 하는지, 죽은 학생이 불쌍하다」라는 등 뭐 이런 생각들만 했었다.

하지만 학교에 돌아와 내가 듣게된 얘기는 뉴스와는 달았다.

그리고 내눈으로 볼 수 있었던 사실도 뉴스와 같지 않았다.

시위중 사망한 학생은 나와 같은, 대학에 들어온지 2달도 채 지나지 않은 새내기였고, 그날의 시위는 학원자주화 투쟁중에 불법구속된 총학생회장을 구출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거다.

그리고 그 경대의 사망은 백주대낮에 시위진압중인 전경들에게 쇠파이프에 무차별로 두들겨 맞아서…라는 얘기를 듣고 나는 너무 혼란스러웠다.

이런 일이 사실일까? 사실이라면 도대체 정부와 경찰은 누구의 편이고 고등학교 때까지 내가 배웠던 것은 다 거짓말이란 말인가? 사실을 알고 싶어서 나는 집회에 나갔었다.

정말 많은 학생들이, 시민들이 분노하면서 모였다.

그러데, 신촌세브란스 병원에서는 경대의 시신을 지키기 위해서 밤낮없이 학생들이 영안실입구를 지켜야하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경찰과 전경들이 우리학교 후문 주차장에서 아예 먹고 자고 하면서 경대의 시신을 빼내갈 기회를 노리고 있었던 것이다.

경대의 죽음을 은폐하기 위해서 말이다.

「죽인 것도 모자라서…」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새내기였지만 너무나 이해할 수 없는 기막힌 상황속에서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었다.

매일매일 열리는 집회에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모였고, 우리는 정부측에 사실규명을 외쳤다.

하지만 정부측에서는 난생 처음보는 지랄탄이니, 물대포니 이런 것들을 차별적으로 쏘아댈 뿐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런 시국 속에서 정부의 각성을 요구하면서 분신했고, 시위중 다시 폭력진압으로 성균관대의 김정귀학우가 죽어갔다.

91년을 생각하면, 열사들의 죽음과 함께 분노가 다시금 일어난다.

올해도 수입개방문제로 많은 집회들이 있었고, 많은 노동자들이 30%라는 물가인상 속에서 노총과 경총의 밀실협잡을 통해 겨우 5%임금인상 합의되었고, 경제발전·국제화라는 미명하에 수없이 착취당하고 있는 현실이다.

한쪽에서는 철거민들이 울부짖고, 노동자들이, 농민들이 착취당하고 있는데 우리는 감히 이제 새상이 좋아졌다는 말을 그렇게 쉽게 할 수 있는가? 「우리가 헛되이 보낸 오늘은 경대가 그렇게 살고픈 내일이어라」 안일한 생활 속에서 벗어나, 다시 한번 자신이 살아온 날들을, 그리고 오늘을 되돌아 봤으면 좋겠다.

김주연(도서관·4) 현실을 돌아보게한 나의 첫 집회 - 노동절 청년학회결의대회를 다녀와서 4월30일(금) 노동·연대·투쟁-1백 4주년 「세계노동절 청년학생결의대회」가 고려대 민주광장에서 열렸다.

우리과에서는 사회부 중심으로 선배들·친구들과 노동절의 의의를 토론하고 함께 고려대로 향했다.

나로서는 처음으로 참가하는 집회이기에 반쯤은 두려움으로, 반쯤은 호기심으로 발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오후 1시가 넘어서면서부터 하나둘씩 여러학교 학생들이 광장을 채우고, 숙명여대·연세대·수원대등과 우리학교의 문화선동 경연대회부터 집회가 시작됐다.

본행사에서는 여러노동자분들의 연대사와 「청년학생 제 3자 개입선언」이 있었다.

삭발을 하신 원진레이온 노동자분께서 『건강을 강조했던 김영삼대통령이어서 우리는 문민정부가 원진문제를 해결해주리라고 기대했었지만 돌아온 것은 폭력뿐이었다』라고 말씀하시며 이제 원진노동자들은 폭력도 불사하고 투쟁하겠다고 하셨다.

또 한 여성노동자분께서는 『제 3자 개입선언이라는 학생들의 구호가 너무 기쁘다』라고 하시며 정부의 「사회적 합의」「국가경쟁력 강화」의 허구성을 말씀하셨다.

그날의 집회에서 난 과연 내가 사회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가를 되돌아보고 내가 직접 체험한 일이 아니라면 방관자적 입장에 서려하는 내 자신을 채찍질하게 됐다.

그러나 나의 집회참가가 그냥 다른사람들에 휩쓸려 대학생이라는 특권의식에서 갔던 것인지, 아니면 진정 내가 해야한다고 느꼈던 것인지 잘 모르겠다.

그렇지만 한가지 확실한 틀림없는 것은 앞으로의 대학생활동안 이번 집회의 경험은 나의 생각을 넓혀주었으며 사회현실에 대해 다시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김민정 (외교·1) 행정위주 식당운영 학생편의 고려해야 우리 학교에서 학생들이 강의식 다음으로 제일 많이 가는 곳을 꼽으라면 아마도 식당과 증명실일 것이다.

두곳은 또한 학생의 편의가 제일 반영되지 않는 곳이기도 하다.

이중 식당에 관한 문제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보통, 다른 학교식당에 비해 우리학교식당의 음식은 양이 적다.

물론 여자들이 먹는 양이 있고 또한 음식양이 많아 남겨서 버리는 것보단 적게 주어진 음식의 양이 식당을 운영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좋겠지만 학생들에게 보다 자율권이 주어졌으면 좋겠다.

며칠전 학교식당에서 일품요리인 비빔밥을 먹게 되었다.

평상시대로 나는 김치를 두개 집어서 식단위에 놓고 계산을 기다렸다.

그런데 계산원이 김치하나의 값을 더쳐서 1천 2백원을 부르는 것이었다.

얼마전에도 계산원에게 김치를 하나 더 가져가도 되겠느냐는 물음에 그렇다는 긍정적인 답변을 들었는데 요번에는 번복을 한 것이다.

이렇게 파는 사람 마음대로 공짜로 주었다가 어떨땐 김치를 한개이상은 불가라는 말을 할 수 있는가? 다른 학교식당은 내가 가본곳중 여러 곳에서 점심식사의 경우 9백원에서 1천원 사이이며 김치의 경우 한솥씩 식당앞에 놓고선 학생들이 임의대로 가져갈 수 있게 해 놓았다.

또한 아침(오전 8시~ 9시 30분), 점심(오전 11시 30분~오후 2시), 저녁(오루 6시~7시)으로 나뉘서 학생들에게 식사를 제공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 학교는 어떠한가? 아침에는 분식으로 그리고 저녁의 경우 5시 이전까지가야 일품요리라도 하나 먹을 수 있지 아니한가? 저녁 늦게까지 공부를 하는 학생들은 도서관의 분식을 이용하지 않으면 15분정도 학교 밖으로 걸어나가서 2천 5백원을 주고 고가의 저녁을 먹어야 한다.

이렇듯 행정편의주의에 입각하여 학생의 복지를 고려하지 않은 식당운영이 이뤄지고 있다.

따라서 먼저 식당급식에 있어서 시간의 분할과 다음으로 기본반찬, 특히 김치의 경우는 학생들이 자신이 먹고픈 양만큼 직접 덜어서 먹을 수 있게 조치되길 희망한다.

이은경 (대학원 사생과 2학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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