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관된 문예 선전조직건설로 나가야 안재권 서울대 노래 패「메아리」활동 수학과4 대학문예운동은 소위 진보적 문예운동의 요람이었으며, 지금도 역시 그 일부로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그 오랜 역사와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그 위상에 대한 상은 명확히 정립되어 있지 않다.

그리고 그러한 처지에서 기인하는 엄청난 질곡에 의해 고통받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대학문예운동은 두가지의 질적 규정을 받고 있다.

하나는 그것이 학생운동의 일부에 편제되어 그것에 복무한다는 것이고 , ㄸH하나는 문예운동으로서의 특수한 규정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두가지의 규정은 대학문예운동속에 어떻게 「통일」되어 존재하는가? 적절한 절충점? 혹은 그 어느 하나로의 용해? 「통일」이라는 말이 그런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현실은 그러한기계적 결합속에 남아있다.

적절한 절충점이란 애초에 존재하지 않고, 따라서 이것에 대한 추구는 결국 양측의 어느 한편향으로 귀결되거나 혹은 좌충우돌하는 「비참한 결과」를 낳았다.

그리고 이 두 축의 현실적인 「충돌」 은 더욱 조악하게도 문예적 기량 혹은 기술적인 숙련도인가 또는 정치적인 능력인가 라는 「양자택일」의 차원으로 추락한다.

사실상 이러한 문제의 기저에는 학생운동의 한계가 깔려있다.

그러나 아직 수공업적인 단계에 있는 학생운동은 대학문예운동을 하나의 도구로서만, 좀 더 적나라하게 이야기하자면 문예운동의 변혁적 전망을 사고하지않고 다만 「따까리」로서만 사고하는 경우가 많다.

결과는 확보된 선전선동 공간을 그런 식으로 방기하면서 동시에 문예실천의 질을 장기적으로 저해하게 되는 것이다.

또한 문예실천가 자신은 자신의 실천의 중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허탈해 한다.

한편으로 문예의 전문성을 기술적 숙련도로 최환하는 사고속에서 정치적 실천은 「연습시간을 까먹는 」존재정도로 여겨지기도 한다.

여기서 대학문예Dㅔ 종사하는 인자 혹은 집단은 갈등하게 된다.

정치의식이 있다고 생각되는 인자는 「따까리」가 아닌 「떳떳한 활동가(?)」가 되는 길을 택하게 되고 문예적 지향이 높은 인자는 아예 문예운동판을 떠나 「자유로운 예술가(?)의 길을 선택하거나 하는 」결과적으로 대학문예운동은 양면으로 인자들을 잃게 된다.

이러한 갈등은 통일성의 이해 속에서만 지양될 가능성을 가진다.

문예의 뛰어난 「선전·선동매체」로서의 복권과 역으로 당파적 실천속에서만이 문예의 발전전망이 가능하다는 이해가 필요한 것이다.

즉 운동의 발전의 문제이고조직화의 문제이다.

대학문예운동 자신의 조직화의 문제는 일차적으로 학생운도의 조직화에 달린 것이지만 궁극적으로 전체 변혁운동, 핵심적으로 노동자 계급운동에 가 닿는다.

당파적 실천의 한 의미가 바로 여기에 있다.

당파적 조직화의 문제가 대학문예운동에 있어서 대기론적인 문제가 결코 아님은 당연하다.

최근 몇몇 학교에서 학내에 일관된 문예선전·선동조직을 건설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이를테면 「문연」건설사업과 같은) 이러한 방향이야발로 당파적 실천의 기초이며 현단계 대학문예운동이 나아가야 할 길이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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