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생각한다.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5월 20일자 이대학보를 읽던중 2면에 게재된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해 침묵하지 못한 한 학우」가 쓴 글을 읽고 저히 침묵할 수 없기에 연필을 든다.

대학에 온 날부터 지금까지 나는 현실속에서 동떨어져 있으면서 현실을 너무도 긍정하고 옹호하는 하나님과, 또 너무나도 현실속에 깊숙히 관여하시고 항상 억눌리고 핍박받는 자들과 함께 피흘리시는 하나님 사이에서 고민했다.

성서도 살펴보고 긴 역사속에서 여러가지 이견들을 제출한 많은 신학자들의 신앙고백을 겸손한 마음으로 귀기울여 봤지만 나에게는 오직하나의 하나님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것은 자신의 형상대로 만인을 평등하게 창조하시고 인간이 더불어 함께 살기를 바라며 축복하셨던 「창세기」에서의 하나님, 애굽이 히브리인들을 억누르고 노예로 삼을 때 히브리노예편에 서서 뒤쫓던 애굽 군사들을 홍해바다 속에서 처절하게 죽게함으로써 복수하시던 「출애굽기」에서의 하나님, 고리대금으로 가난한 자들을 노예로 팔아넘기며 자신들의 영원한 평화와 안정을 위해 하나님께 제사를 지내던 통일이스라엘을 무너뜨리셨던 「아모스」에서의 하나님 이었다.

게다가 공판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은 민중의 아픔과 고난을 이해하시기 위해 친히 로마 식민통치기간에 이스라엘의 아들로 누추한 마굿간에서 태어났다.

하루라도 벌지 않으면 입에 풀칠조차 할 수 없는 많은 사람들을 죄인으로 만들었떤 당시의 국가보안법인 안식일법을 예수님은 『안식일은 인간들을 위해 있는 것이다』라고 반박하여 그들의 사회적 죄를 합리화, 해방시켜주셨으며 신분제도를 철폐하시고 남들이 손가락질하는 창녀와 세리를 벗하셨다.

뿐만아니라 사회적으로 무시받는 무식한 어부들을 친히 제자로 삼으셨다.

이런 예수님을 사회질서를 혼란시키고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는 불경한 자로 매도, 정치범에게만 적용되던 십자가 처형으로 죽게 했던 국가권력. 그런 그들의 악에 대한 전면적 승리와 철저한 선전포고로 당당히 부활하시고, 정의가 영원함과 그를 믿는 많은 이들에게 희망을 보여주시며 끝까지 투쟁하게 하셨던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 그를 선포하고 그를 위해 온갖 핍박을 극복하여 오늘에 이른 기독교. 이런 하나님이 어찌 오늘의 현실에서 침묵하시고 수많은 죽음을 있게 한 국가권력에 순종하라 하셨겠는가? 선한 자들을 상주고 악한자들을 벌주는 권력만이 하나님께로부터 왔고 그런 권력에게만 충성해야 한다는 로마서에서의 사도바울의 고백이 어찌 이 땅 모든 국가권략에 순종해야 한다는 말로 매도당하는가. 하나님의 뜻이 가진자들에게 이용당하고 왜곡되는 현실이 고난 당하는 민중뿐 아니라 하나님도 고통당하시게 하고 있다.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우리의 투쟁을 요구하고 있다.

하나님은 이땅에서 불평등이 존재하여 소수의 가진자가 다수의 없는 자들을 억압하고 빼앗기를 바라지 않으시며, 모든 악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타도하고 하나님의 뜻이 이땅에 강물처럼 넘치기를 바라신다.

기독교는 더 이상 하나님의 이름으로 사회악을 합리화해서는 안된다.

그것은 정말로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것이기 때문이다.

너무도 혼란한 우리의 현실속에서 이땅의 자주와 민주와 통일을 위해 투쟁하는 것이 진정 하나님의 뜻임을 나는 믿는다.

「오직 공법을 물같이 정의를 하수같이 흘릴지로다(아모스서 5장 3절)」 조진경(기독·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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