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단위 학생회 건설로 시작합시다" -본교 대학원 운동을 점검한다- 민중지향적 학문에 대한 인식의 결여 심각 대중운동과 학술운동의 차원에서 접근해야 이미 다른 대학에서 오래전에 문제제기 되었고 어느정도 성과를 내온 「대학원운동」에 대해 언급하려는 것이 보수적인 이화의 원생들에게는 별다른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우려속에도 새로이 문제제기 하려는 것은 아무리 지금 현재대학원생들이 무관심의 길을 걸어도 한국사회에 소속되어 있는 한 부과되는 여러 문제들을 회피할 수 없으며, 그것이 어느 한순산에 자신의 절실한 문제로 다가와 스스로를 엄청나게 변화시킬 수 있다는, 그래서 역동적인 역사의 발전 속에 자신을 위치 지울 수 있을 것이라는 전망의 긍정성 속에 가능할 것이다.

대학원 운동의 진보적 역할 제기 우선 전제가 되어야 할 것은 「학문을 왜 하고 있는가」에 대한 스스로의 되물음이다.

단지 개인의 만족을 위해 대학원에 진학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학문은 바로 이데올로기적 측면의 강한 고리이기 때문이다.

지배계급이 자신의 합리화와 지배력의 강화를 위해 항상 재생산 하는 것이 바로 자본주의적 이론의 생산이다.

기존의 학문과 이론은 바로 지배걔급 이론의 재생산에 공헌해왔다.

그러나 대학원생들에게 학문하는 이유를 개별적으로 질문해 볼때 「사회내에서 자신들이 이바지할 수 있는 부분을 찾고자 한다」는 긍정적인 다답이 대부분이었다.

바로 여기에서 본교 대학원운동의 토대가 시작 될 것이다.

함께 학문하는 이화, 개인적으로 천재적인 지식을 자랑하는 곳이 아니라 함게 공부하고 고민하여 나온 결과물을 이 땅에 되돌릴 수 곳이 대학원이어야 한다.

이와같은 전제하에 대학원운동의 필요성과 그 이론적 토대및 이화 대학원 운동의 상황과 과제 등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해방이래로 이식된 자본주의의 제 모순들은 70년대말 사회·경제·겅치적 위기를 초래하였고, 교육의 측면에도 이것은 파급되어 대학입시정책을 비롯한 많은 문제를 노정시켰다.

이러한 위기상황을 거쳐 등장한 전두환정권은 군부독재라는 자신의 취약한 기반을 굳건히 하고 정권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일환으로 「교육개혁조치」를 실시하였다.

그러나 「졸업정원제」로 대표되는 당시의 대학정책은 제반문제를 해결하지 못한채, 대학구성원의 급격한 증가와 함께 고학력 실업군만을 형성시킨 것이다.

6,70년대에 대학원 졸업은 어느정도 취업의 보장과 함께 세상사회적 걔층상승을 용이하게 하였다.

그러나 80년 이후 과잉 고학력실업군의 존재는 대학원의 입학수를 늘려, 대학원이 안정적인 지위 확보의 수단이 아니라, 또 하나의 더 심화된 잠재적 산업예비군을 양성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이는 기존 대학원이 지식을 생산하고 전파하면서 동시에 이를 수행할 이데올로기들을 배출하는 역할만을 더이상 수행할 수 없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또 다른 측면에서 보면 대학원에 다양한 구성인자가 포함되었다는 것은 일정한 이해와 요구를 지닌 대중지반이 확충되었다는 의미를 갖는다.

학생운동의 양적인 성장과 함께 내부역량의 비약적인 축적은 민족민주운동의 성장과 함께 내부역량의 비약적인 축적은 민족민주운동의 성장과 함께 내부역량의 비약적인 축적은 민족민주운동의 성장과 함께 이론투쟁을 수행하게 하였고, 동시에 노동운동을 중심으로한 여러 사회운동과의 유기적인 연대를 고민하게 하였다.

여기서 기존 노동운동 중심의 투신인식에 변화가 오게되어 보다 확장된 투신의 지형을 모색, 대학원공간이 가진 진보적 역할의 가능성이 제고 되었던 것이다.

학술운동의 새로운 주체로 부각 동시에 80년 광주민중항쟁을 경험한 민족민주운동의 세력확장및 실천의 굳건한 기반들은 운동을 강화시킬 이론들을 요구하게 되고, 유명한 CNP논쟁을 통해 이론의 중요성이 각인됨과 동시에 학술운동의 의미도 확보되었다.

즉 80년이후 민족민주운동의 변화는 기존 학문을 탈피할 것을 요청하게 되었고 이에 부응하여 80년대 진보적인 학계는 「실천성」을 중시하는 민중지향적학문을 주창한다.

여기서 「실천성」은 기존학문의 역사속에서의 단절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45년 직후 「과학자동맹」을 시작으로 지속되어온 역사속에 살아있고, 다시복원되는 연속선상 의 「실천」인 것이다.

이러한 학술운동은 전체운동의 발전과 함께 생명력을 보장받고 일정한 발전과정을 보여준다.

그러나 기존 학술운동의 주체가 비합법적공간이었던 연구단체 중심이었다는 것은 운동이 성숙되어가는 과정에서 절대적인 한계로 나타난다.

이시점에서 합법공간이면서 진보성을 확보할 수 있는 대학원이 학술운동의 새로운 주체로 부각되는 것이다.

이상의 여러 측면이 결합되어 이제 대학원은 혼자 학문하는 곳이 아니라 한국사회의 변혁운동에 일정부분 공헌해야하는 능동적인 역할을 부여받게 된다.

여기에 대학원운동의 필요성이 존재하는 것이다.

한국사회에서 지식인은 생산수단을 지니지 못하면서 자본자에 의해 생산물을 전유 당하는 비생산적인 노동자로 규정된다.

동시에 육체노동이 아닌 지식을 매개로 하기에 이데올로기 생산과 재생산 부문 속에서 현실적으로 맺고 있는 과제레 따라 소부르조아와 인텔리적 허위의식을 가질 수 있다.

따라서 허위의식 속에서 지배계급의 이해를 대변하기도 하고, 민중의 입장을 지향하는 정반대의 지위를 갖기도 한다.

그러나 앞에서 지적했던 대로 여러 요인들의 작용아래 지식인인 대학원생은 민중지향적인 입장을 지닐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결국 대학원운동은 사회변혁운동의 부문운동의 성격과 원생의 대중운동을 지향하는 진보적인 학문사상의 연구활동과 원생 대중의 정치·경제·사회·문화 등의 전반적인 영역에서의 실천이 활동으로 표현되는 운동인 것이다.

대학원운동의 과제 그러나 이와같은 진보적인 운동들은, 특히 학술부분에서 「민주화」를 내걸고 보수성을 강화하려는 6공화국이 등장하면서 어느 정도 퇴보한 모습을 보인다.

5공화국의 군부정권이 자기 손으로 직접 강압정치를 행사했던 것에 비해, 6공화국은 광범위한 대중매체와 대중단체를 통한 「시민사회」의 확대를 내걸고 간접적인 제한 통치를 수행하였다.

바로 극단적인 예가 중산층을 포괄한다는 3당합당이 될것이다.

3당합당은 가시적인 대립화의 조장과 함께 사회전체의 보수화를 촉진하는데, 이는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지는 언론계와 학계를 매개로 한다.

이에 따라 학문의 보수화는 빠른 속도로 확장되어 학생들의 활동영역을 축소시키고 학문적 상상력까지도 제한하게 되었다.

결국 80년대의 진보적 학문실천의 경험들은 설 자리를 찾지 못하고, 대학원생의 실천지반 역시 흔들리게 된 것이다.

여기에서 대학원운동의 중요성이 재인식되고, 부과되는 과제들의 재정리를 필요로 하는 것이다.

대학원운동은 우선 학술운동으로서의 과제와 동일한 내용을 갖는다.

즉 지배계급의 지배이데올로기에 대항할 대체 이데올로기를 창출, 보급하며 전체 변혁운동의 사상적·이론적, 전략적·전술적지침을 생산하며 연구자 대중을 조직화하여 부분 운동으로서의 자기기반을 확대하는 여러 과제들을 대학원 내부에서 독자성을 지니고 활성화될 수 있게 해야 한다.

동시에 학술운동 인자의 재생산체계를 대학원 내에서 이룩하여, 대학내 진보적 연구성과나 변혁이론및 사상을 대중화하는 공산들을 지속적으로 마련하는데 중점을 두어야 한다.

또 다른 하나는 대중운동으로서의 과제이다.

이는 진보적 연구자 대중을 묶어세워 전체 민족민주운동선상에서 외곽정치역량으로 전환시켜 내는 일이다.

또한 이러한 역량이 학술대중과 대학원이라는 지반위에 굳건한 대중적 기초를 갖도록 해야 한다.

이 과제는 대학원운동의 기본적 영역으로 원생의 제반권리 옹호와 대학의 민주적 개편사업을 그 내용으로 한다.

이는 열악한 연구조건의 개선, 커리큘럼의 개선, 교수와 원생간에 도제적 관계의 청산 , 각종 비민주적 학칙의 개정등 대학원 대중의생활적 이해와 요구인 동시에 진보적인 학문연구를 위한 전제조건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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