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의 정치와 죽음 누구나 어린 시절을 거쳤을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그 순수성을 높이며, 어떤 사람은 어린이의 눈망울에서 성자의 원형을 발견한다.

그러나 사회의 제반 억압적 불합리는 어린이의 꿈을 악몽으로 변하게 하였다.

오늘날에도 어린이는 그 악몽을 보아야 할 처지에 있다.

사람은 성장하면서 자신에게 운명적으로 주어진 이 과거의 긴 역사를 가진 사회에 대면하게 되고, 그 안에서 자신의 지위에 따른 기능을 연출한다.

그러나 가진 자 안 가진 자의 대립, 지배와 피지배의 알력이 존재하지 않는 사회의 경우에는 그 사회적 인격은 타인과 대립하지도 않고, 자신과의 분열을 일으키지도 않을 것이다.

이제까지 인류가 동경해왔던 대부분의 이상함에는 그러한 원융한 관계가 핵심적 내용으로 들어가있다.

그러나 인류역사에서 재화와 그 축적수단의 불평등한 소유관계가 창조되고 국가 권력이 형성된 이후로, 자연에 대한 지배관계가 발전되었다.

사회적 인격은 지배자, 피지배자로서 경영자, 생산자로서 나타나게되었다.

지배자들은 국가발생과 함께 자란 이른바 공권력을 행사하고 안정을 희구하는 것이다.

명말 청초의 사상가인 황종희의 표현에 의하면 그것은 「자신의 거대한 사욕을 공적인 것으로 주장하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서 어떤 형태이건 간에 국가권력의 억압성이 있는 것이며, 특히 군사독재체 의해 그 권력이 행사될 경우 그 야만성은 노골적으로 드러나게 된다.

그 문화는 엄단, 감시, 테러의 문화이다.

오늘날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대학생에 대한 신체적 타살은 바로 그런 맥락에서 인식되어야 할 것이다.

그것은 등가의 두 집단이 게임을 하다가 일어난 우연한 사건이 아니다.

그것은 권력의 유지와 화폐증식을 삶의 목적으로 가진 자들이 자신의 인생관을 관철시키는 진부한 방식이다.

그 인생관은 그 목적이 증시하듯이 본질상 타인의 신체적 정신적인 행복과 자유에 대해서는 냉소적이며, 그래서 대중의 생명의 자유로운 확대에 대해서는 부정적이다.

거기에는 타인의 불행에 대해 고뇌하는 어떠한 고결한 감수성도, 숭고한 미래의 이상도 없다.

따라서 화염병과 최루탄의 공방전, 혹은 세대간의 갈등, 또는 보다 나은 사회가 되기 위한 과도적 통증으로 보는 것은 사태의 핵심을 흐리게 하는 것이다.

그것은 인류의 역사적 인생의 본질과 연관된 문제이기 때문이다.

한편 경제, 정치영역의 권력집단은 본질적으로 나머지 대다수 대중에 대한 이용과 관리위에서만이 자신의 존립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에 그들은 타인의 불행이나 희생을 먹고 살수밖에 없다.

이러한 비인간적 상황에 대한 항거에 대해서는 회유와 각종 억압이 대기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들이야말로 반사회적이며 인간적 생명에 적대하는 세력인 것이다.

소수권세가들이 대다수의 생명을 인질로 잡고서, 순종하는 자에게는 착하다 하고 항의하는 자에 대해서는 죽음의 공포로써 협박한다.

그렇다면 그들이 어찌 진부한 생명존엄론조차 얘기할 자격이 있겠는가? 노자에 의하면 「백성이 자신의 성명을 가벼이여기는 것은 상층집단이 자신의 생명만을 추구하는 것이 지나치기 때문이다」 바로 여기에 어느 여공의 외로운 자살, 대학생의 정치적 자살, 노동자의 죽음을 사회적 측면에서 이해해야 하는 원인이 있을 것이다.

우리사회가 만든 이러한 죽음은 타성에 찌든 산자의 삶을 깊이 뉘우치게 하며, 정치적 자살의 경우는 인간은 각성할 수 있다는 인간에 대한 소박하지만 선량한 신뢰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만으로 자살에 대한 이해가 다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자살은 나와 내가 관계맺고 있는 우주의 유일한 예외이며, 그 만큼 심각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예외적 선택은 자신의 생물학적·사회적 삶을 단절·부정하는 것이다.

아울러 그러한 삶의 가치까지도 절단된다.

가치는 아무것도 아니다.

따라서 죽음에 대해 생명이나 인륜의 가치를 가지고 비난하는 것은 그것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지도 못하는 것이고, 이미 무효화된 위력을 다시 사용하는 꼴이 될 것이다.

가치란 어떤 방식으로건 살기를 선택한 자에 한해서 의미가 있으며, 또 그러한 선택을 자명한 것으로 전제한 사람들에 의해 창조된 것이기 때문이다.

바로 여기에서 제반 가치체계에 입각한 삶, 그래서 자신의 우주와 친근한 삶, 착취와 억압까지도 친근해져 버린 삶, 득의에 가득찬 오만한 생명의 과시로서의 삶은, 인간자신의 저 본래적 진로로서의 죽음에의 의식으로부터 도피한 제이의 적이라는 것이 드러난다.

그것은 본연의 유한성의 자각, 우주는 본래 인간의 우주가 아니라 비존재의 공허 속에 떠있는 단순한 존재일 뿐이라는 이 본질적 사실ㅇ르 은폐하고 있는 것이다.

가치란 우리의 생과 그 우주의 배후에 있는 이 거대한 공허를 숨기고, 다시 생과 우주를 밀착시키는 끈끈이에 불과한 것이다.

따라서 생이란 근본적으로 제일의적인것이 아니라 본래의 진심에서 도피한, 본질적으로 타락한 양식에 속한다.

인간은 누구나 이 타락이라는 죄에 대한 깊은 가책을 내면에 감추고서 타인 앞에 나타나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의 전반적인 황금숭배,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총체적인 인간성 상실은 총체적인 소외를 보여주게 되었다.

이것은 이제 착취와 억압, 그리고 이것을 감싸거나 관념적으로 해소하는 일체의 가치관은 전반적으로 무의미한 것으로 부정하고 있다.

또한 이것은 역설적이게도 인간을 죽음에의 의식에 한층 접근시킨다.

그러나 이것을 숨기려는 온갖 물신주의도 만연하고 있다.

죽음은 바로 이 물신주의적 속임수에 대한 부정이다.

죽음은 저들의 당당한 가치관을 비웃는다.

사태가 이러하다면, 인간의 생을 다루는 진정한 정치는 물신주의를 조장함으로써 유한성의 고독 속에서의 자기각성을 저해해서는 안될 것이다.

또한 그것이 실질적 죽음을 방지하는 그래서 이 생을 긍정하도록 하는 장치라면, 최소한 그러한 여건을 만들어야 할 것이다.

노동의 착취와 온갖 억압은 죽음을 각오하게 할 것이다.

정치와 경제의 인간화만이 그래도 생에 대한 정을 느기게 하며, 인간은 그 공동체 속에서 자신의 유한한 존재에 겸허하게 밀착하며 살게 될 것이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그것도 피압박대중은 이렇게 살기를 염원한다.

그러나 이 한가닥 소원을 짓밟는 폭정과 그 폭정의 세월은 이 최후의 희망에 의해 단죄될 것이며, 대중은 다시 자신의 세계를 획득하고자 할 것이다.

폭정의 집단과 그 기구는 잔잔하면서도 격노하는 이 대중의 바다 위에ㅣ 떠있는 하나의 조각배에 불과하다.

저들은 이것을 이용해야 할 위기의 판도로 이해하겠지만, 그것은 위기가 아니라 그래도 살고자 하는 대중의 역사적 본질의 표출인 것이다.

이 본질을 저들은 어둠의 세력 운운하며 기리고자 하니, 정작 어둠의 세력은 자기자신이었다고 하는 것을 대중 앞에 고백할 때가 올 것이다.

바로 조각배가 난파할 때ㅡ. 이규성 철학과 교수
저작권자 © 이대학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