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해가 저무는 시점에 서면, 우리 모두는 생각에 잠기게 된다.

서기 2000년을 가늠할 마지막 10년을 시작한 올해의 의미때문에 우리는 이전보다 더욱 상념케 된다.

국내외의 구조적이며 급격한 역사의 흐름은 너와 나를 무력하게 하고 우리 모두를 역사에서 소외시킨다.

이러한 까닭으로 나는 무모하게도 이글에서 너와 나를 역사의 주체로 부각시켜보고자 한다.

국가적 수준에서 보면, 역사는 곧 국가의 존재를 의미한다.

한 나라가 다른나라를 지배할때 대체로 군사, 정치, 경제, 문화를 장악하는 순서를 밟지만 최종적인 단계는 역사를 종식시키는 작업으로 끝난다.

역사의 중단은 해당국가의 소멸을 의미한다.

같은 논리를 개인에게 적용하면, 개인 역사가 단절된 삶은 실존적 자아가 없는 생물학적 생존을 의미힌다.

우리 역사에 대한 우리들의 인식 수준을 파악하기 위해서 편리하게 시간과 공간으로 나누어 보자. 우리들은 시간적 측면에서 아주 오래된 시대에 너무 많은 관심을 기울여 왔다.

선조 곰이야기에서 부터 시작된 역사가 고조선, 전삼국, 통일신라, 후삼국, 고려 시대에 이르면 지체게 되고 역사를 오늘의 삶과 연결시키는데 어려움을 겪게된다.

이때 역사는 공허한 이야기로 끝나버리며 사적 메시지를 전달하지 못한다.

우리가 배운 국사는 우리들의 구체적이며 실제적인 오늘의 삶에 생생하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 현대사와 최근세사에 대하여 대단히 소홀하다.

초·중등학교 국사교과서를 분석해보면, 우리들은 현대사와 최근세사를 배울 기회를 박탈당했다고 말할수 있을 정도이다.

학교의 교과과정은 사회에서 정통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지식에서 선정되고 조직된다고 믿는 우리들의 통념은 경험적으로 증명된 바가 없으며 최근의 국내외 연구논문들은 이러한 상 을 부정하고 있다.

이러한 연구물들의 주자에 따르면, 우리 국사교과서에서 현대사와 최근세사가 빠진 사실은 의도적인 것으로 볼 수 있다.

비록 의도의 주관자들을 명백히 밝힐수 없지만 의도성이 게재되고 있음은 포착 할 수 있다.

현대사가 없으니 현대사의 주체인 우리의 부모들과 우리 자신들까지도 실재하고 있는데고 불구하고 역사에서는 「없는존재」가 된다.

우리들은 역사의 공간적 측면에서도 「없는 존재」일 수 밖에 없었다.

왕조사 중심의 역사에서 시민과 민중이 비집과 들어갈 큼이 있을리 없다.

우리들은 이 사실을 구체적으로 경험하기도 하였다.

그 숱한 텔레비전 역사 드라마에서 우리들의 선조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테마의 흐름에 전혀 영향끼치는바 없었으며, 가끔은 궁상스럽게만 보여 그들이 비굴한 모습으로 등장한 잔면들을 없애버리면 드라마가 훨씬 박진감이 있을 것 같았다.

정치사 중심의 역사 전개방식에서 일상적 삶의 모습을 담고 있는 사회문화사가 차지할 수 있는 분량은 극히 제한되기 마련이다.

제한된 분량과 인색한 관심은 그 존재를 약화시키는 이데올로기적 효과를 얻는다.

현대사에 보다 집착하고 사회문화사에 착목하면, 우리들의 존재가 희미하게나마 드러날 수 있다.

역사속에서 희미하게나마 드러난 우리 자신들의 모습을 들여다보는 우리들은 이미 역사속의 실체가 된다.

우리는 이 사실을 빛바랜 사진을 뒤적거릴때 경험하였다.

내 모습이 담겨잇는 누렇게 바랜 흑백사진이 선명하고 화려하게 채색된 관광용 사진에서 도저히 느낄수없는 생생한 감동을 전해준다.

조그마한 사진에 너무 많은 사람들이 들어 있어 내 모습을 찾기 위해서는 앞에서 몇번째 그리고 왼쪽에서 몇번째를 세어보아야 하지만 그 못브을 보고 나의 삶을 반추하며 내일의 나를 그려보게 된다.

우리는 감상에 젖어보아야 현실속의 나의 참모습을 파악할수 있고 내일을 계획할수 있음을 알고 있다.

이제 우리들은 자존심을 지키기위해 대단한 결심을 단행할때다.

현대사와 사회문화사에서조차 소외되더라고 도도하게 살아가야할 때이기 때문이다.

40여년을 살아온 나역시 역사의 주체가 되어본적이 없다.

태어났을때부터 지금까지 독재자와 정통성없는 정치 지도자들만을 보아왔다.

이제 더이상 짜증을 내거나 허황된 기대에 우리들을 맡길때는 아닌것 같다.

현대사 역시 정통성없는 거물 정치꾼들과 그 주변에 있는 사람들로 채워질 것이기 때문이다.

실체가 파악되지 않은 구조속에 매몰된 진정한 의미에서의 보통사람들인 우리들이 각자에게 주어니 천수나마 유의미하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우리들의 개인사에 집착해야 한다.

우리들은 우리들의 이름을 되찾아야한다.

우리들의 이름은 우리자신들의 뜻과는 무관하게 너무 많이 도용되어왔다.

역사를 언급하는 거물을은 우리들에게 사용허가를 받지않고 우리를 「국민」이라 이름하여 짓눌러 대었다.

그들이 「국민」운운할때 나는 내가 그 속에 포함되는지 스스로 묻곤한다.

이제 우리드르이 개인사에 대하여 심층적으로 생각해야 할 때다.

현대사와 사회문화사에 크게 비중을 두며 역사책을 몇백배로 늘려보아도 우리들의 이름은 여전히 등재되지 못하겠지만 우리들은 시퍼렇게 오늘을 살고 또한 살아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개인의 역사라고해서 아무렇게나 만들어지는게 아니다.

역사는 왜곡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을 변명하고 미화하는 것을 왜곡이라 한다면, 역사의 왜곡은 어느 누구나 쉽게 빠질수 있는 함정이다.

역사를 왜곡하는 것이 얼마나 한심한 짓인지를 우리들은 일본을 사례로하여 명백히 인식하고 있다.

그들의 엄청난 경제력도 역사를 왜곡하는 발상과 접목되면 그들을 소국 콤플렉스에서 벗어나게 하지 못한다.

개인 수준에서 왜곡된 역사를 만들지 않기 위해서 우리들은 자신에게 고백하듯 개인사를 기억하거나 기록해야 한다.

나를 객관화할 때 자아실현희 가능성은 열리며 난세속에서도 의미있는 삶을 살수있다.

이는 최소한 나의 역사에서 내가 주인되는 길이다.

이 글이 독자에게 의미있게 읽혀진다면, 그 이유는 이 글이 나를 독자로 삼고 썼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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