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구들이 모인 저녁 난, 학보사에 보낼까하고 쓴 글을 감정을 넣어가며 읽어주었다.

…빨간 폴라 쉐타 하나를 샀다.

날리는 낙엽들이 눈이라는 착각이 들게 하곤하는 11월의 바람에 어느만큼은 나를 따스하게 해준 새 폴라. 집에 가는 길에 귀여운 대구 말씨의 친구녀석이『니돗구리 샀나?』하고 물으며 예쁘다고 말해 주었다.

순간 어색한 그 말에 웃음이 나오려 했다.

「돗구리라…?!, 돗 바늘로 뜬 털옷이란 뜻의 국어인가 보다」 집에 오는 전철에 앉아 내 생활을 채우고 있는 말들을 떠올리며 부끄러운 웃음을 지어본다.

「control 하기가 힘들다느니」,「mix 를 했다느니」늘 쓰는 말들 속엔 한자어는 물론 외국어가 가득하다.

언젠가 북한의 언어생활을 소개하는 신문에서 충치는 삭은이로, 제왕절개는 애기집 가르기로, 치석은 이돌로 그리고 지구의 자전은 제돌이로 말한다는 기사를 기억한다.

코카콜라를「가구가구」라고 한다는 중국인들. 그 아직은 어색한 낱말들에서 고집스러움보다는 친근감이, 그 노력들에선 부끄러움과 부러움이 느껴진다.

표준어라는 착각 속에 돗구리를 폴라라는 이름으로 난 입고 지낸다.

유난히도 추운 오늘, 빨간 새 폴라가 왠지 더 따뜻하게 목을 감싸는 것은 돗구리란 새이름 때문일까… 하고 내 글을 다 읽어주자, 『아니, 돗구리는 일본말 아이가?』하며 경상도 말씨로 형부가 묻는 것이다.

「돗구리는 자라목털옷」이란 낱말풀이를 국어사전이 아닌 일본어사전에서 찾을 수 있었으니 이게 웬일인가. 돗구리란 말에서 우리 국어의 푸근함이 아닌, 내 무지를 깨달아 웃어버린 유난히도 추운 오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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