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의 날 특집 선배들의 글

『어제 그 곳에서 두시간이나 기다렸는데 끝내 널 볼 수 없었어』 추궁하는 듯한 정환의 어조는 언제나 그렇듯 무겁다.

무거운 건 부담스러워. 입속말을 할 뿐, 나는 입을 열지 않는다.

『끝을 내고 싶은거냐?』나의 속마음을 들여다 본 듯한 정환의 물음. 아루 말도 하지 말아. 나는 스스로에게 말해 준다.

이렇게 끝내는 것도 나쁘지 않으니까. 그러나 내 입은 제멋대로다.

『누가 그런댔어?』 내가 거짓말을 한다는 것을 정환이 독심술사처럼 알아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바램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한 시간 뒤에 그 곳에서 만나자』 찰카닥. 정환이 곧바로 수화기를 내려 놓았고 나는 진저리를 치듯 고객를 흔들며 눈을 감는다.

정환의 어머니, 형제들이 살고 있는 단칸 셋방을 보지 않았어야 했다.

그 볼품없던 세간살이들 또한. 아아 어쩔 수 없는 신음이 입술 사이로 흘러 나오고 만다.

소외계층에 대한 내 사랑이 머리속의 것에 지나지 않음을 깨닫게 된 것도 마음 아픈 일이었지만 무엇보다 정환의 어머니를 향한 거부감을 참기 어려운 탓이었다.

정환을 소유물로 여기는 듯한 그 완강한 모성이 날 질리게 한 것이었다.

어떻게 해야 좋을까. 난 이제 자신과의 싸움에 지쳤다고 정환에게 고백해야 하는 것일까. 그럴 수는 없는 일이야. 내가 침대속을 빠져 나온 것과 전화벨이 울린 것은 같은 순간이었다.

『나야, 성우. 마침내 엄마 승락이 떨어졌어. 집안이 기우는 것이 마음에 걸리지만 그래도 여자쪽이 그러니까 참으시겠다고 마음을 돌려주신거야』 성우는 떠들썩한 목소리로 말하지만 난 한마디도 말할 수가 없다.

정환을 기다리게 했던 시각에 성우네집에 가 있었던 나. 근검절약 끝에 부족하지도 넘치지도 않는 생활을 하게 된 우리집과 달리 넘쳐 흐르는 듯한 부의 과시로 오히려 멀미증을 불러 일으켰던 성우네집. 그리고 더없이 우아한 자태로, 『결혼한 여자가 어지러운 세상을 휘젓고 다니며 일하는 것을 우리 집안에서는 좋지 않은 일이라고 여긴답니다』라고 말했던 성우의 어머니. 『만나자, 만나서 얘길해.』 나의 계속되는 침묵을 감격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인 탓일까. 성우는 『우리 집안 며느리 되기 위해 줄 선 여자들을 생각하면 넌 운이 좋은거야』라고 말하더니 한시간뒤 E호텔 커피숍, 명령하듯 덧붙였다.

한시간 뒤에 난 누구를 만나고 있을까? 잘 알 수가 없지만 어쨌든 마음의 결정을 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두 사람 사이의 줄타기 따윈 내가 좋아하는 일이 아니므로. 나는 책상 위에 올려진 거울 쪽으로 다가가 내 얼굴을 들여다 본다.

한시간 뒤엔 별 수 없이 사람들 속에 있을 것이어서, 귀걸이를 달았다가 떼고 만다.

정환이 좋아하지 않는 일이라는 생각이 떠올랐던 것이다.

옷 고르는 일은 더욱 쉽지가 않았다.

정환과 성우의 취향은 정반대나 다름없었기에. 몇차례 이 옷 저 옷으로 갈아 입고난 다음에야 나는 갑자기 내 취향대로 옷을 입는 것이 좋으리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얼마나 즐겁고 편하였던 것이었을까. 한시간 뒤 나는 학교도서관을 향해 걷고 있었다.

두사람 중에서 어느 한사람을 선택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믿고 있던 것. 그것이 난데없이 우스꽝스레 여겨진 때문이었다.

어느덧 발걸음이 빨라졌는데 정환과 성우 사이를 오갔던 자신에 대해 좀 궁리해 보아야겠다는 생각에 붙들린 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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