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속 이화인의 함성 내귓가에 아직도 생생

87년 6월 항쟁은 내겐 벅찬 감동으로 다가온다.

그것은 교과서를 보고 4,19를 외울 때의 경건함처럼 수많은 역사적인 사실의 한장을 이룰 그 순간에 내가 있었다는 뿌듯함에서 비롯된다.

몇 안되는 내 기억속의 역사적인 사실 중에서 6월항쟁이 유독 기억에 남는 것은 무엇보다도 만5천의 이화인들과 함께 이화인들의 힘으로 그 자리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청바지를 입은 이, 무릎 위로 치켜 올라간 치마를 입은 이, 높은 굽을 또깍거리며 걸어가던 이, 짙은 화장을 한 이 등 모두가 과깃발을 앞세우고 하나로 뭉쳤다.

6월 항쟁의 주역이 따로 없었다.

처음 가두집회를 나가는 이화인들은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켜 가두시위의 경험이 있는 사람들을 불러다 주의사항 등을 들으며 최대한 투쟁의 현장에서 주인으로 서고자 애썼다.

또 쏟아붓는 최루탄 연기 속에서 하루의 투쟁을 마감하고 돌아본 이화교 위에는 이화인들의 얼굴만큼이나 다양하게 생긴 주인없는 신발들이 널려 있었다.

거의 두푸대는 족히 될 정도로. 6월 20일 경으로 기억된다.

총궐기를 통해 대운동장에 모인 이화인들은 개교기념일 보다는 훨씬 많고 전교생이 모였다고 하기에는 출석체크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조금은 빠질 것 같은 수가 모여 집회는 유쾌한 분위기 속에서 치뤄졌다.

그런데 문제가 생기고 말았다.

학생회에 그나마 하나 있던 엠프가 너무나 많은 인원이 모이고 보니 그 수를 감당할 능력이 없는 것이었다.

하는 수 없이 시간당 가격을 지불키로 하고 세운상가에서 3시간을 빌렸는데 5시간 가량을 사용케 된 것이다.

주인은 집회를 하고 있는 중에도 당장 돌려달라고 아우성을 치고 집회는 해야겠고 해서 이화인들에게 주인의 성화를 알렸다.

그순간 어느 구석에선가 구호가 들려오기 시작했고 이내 그 소리는 전체대열로 확산돼 웅장한 메아리 같았다.

『사 버려! 사 버려!』이화인들의 입은 일제히 하나의 구호를 외치고 있었다.

그리고 곳곳에서 사람이 일어서고 모자, 주머니 등이 돌기 시작했다.

한 학생이 뛰어나오고(86학번으로 기억된다) 어리둥절해하는 우리들에게 집회에 참여한 이화인들의 뜻을 전해주었다.

당시의 내 심정을 뭐라고 표현하면 가장 적절할지 아직도 찾아내지 못했다.

모금액은 1백만원에서 약간 모자랐고 우리는 그 돈으로 당시 대학교 중에서 가장 좋은 엠프를 구입했다.

이렇듯 6월항쟁은 작은 부분에서부터 이화인들의 손으로 준비되고 진행되었다.

임미애(88년 경제학과 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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