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록의 계절 5월은 가정의 달이기도 하다.

그런데 금년에도 가정의 달에 들어서기가 무섭게 「한국가정의 위기」라는 말이 각종 매스미디어에 크게 부각되었다.

그렇잖아도 올해는 5월에 접어들면서 누군가의 입에서 「총체적 위기」니 「난국」이니 하는 말들이 흘러나와 온통 나라가 어수선한 판인데, 거기에다 화목하고 단란한 가정의 의미를 재음미하며 보다 뜻있고 보람있는 가정생활의 즐거움을 만끽해야 할 계절에 가정의 위기문제까지 신경써야 할 지경이었으니 도대체 이 나라는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가, 그리고 도대체 우리가, 또 나는 뭔가 하는 심각한 실존의 문제에 부딪히게 되면서 정신이 혼란스럽기만 했다.

그러고 보니 만일 우리 사회가 총체적 위기에 처해 있다면 우리 가정들도 위기에 처해 있을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사회와 가정의 관계는 집과 기둥의 관계처럼 두개가 뭉쳐 하나의 총체적 실체를 이루기 때문이다.

따라서 가정과 사회의 문제는 항상 같이 가기 마련이다.

가정이 변하면 사회가 변하고 사회가 병들면 가정도 병들기 마련이다.

그러기에 위에서 예시한 청소년 문제, 주부의 문제, 가부장의 문제, 그리고 노인문제 등등의 각종 가정문제들의 근원을 이해하려면 우리 사회의 구조적 특징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오늘날 한국사회가 당면하고 있는 위기의 실체를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그것은 이 나라 사회질서의 토대가 되는 규범의 불확실성이며 이것을 구체적으로 도덕적 권위의 부재, 그리고 법의 권위상실로 나타난다.

이같은 규범의 혼란은 바로 가정의 위기의 원인이 되기도 하며 가정에서의 규범의 불확실성은 다른 한편으로는 가부장적 권위의 실추와 직결된다.

사회적 위기문제는 일단 제쳐놓더라도 가정의 위기에 관련해서 강한 설득력을 보여주는 논의는 프로이드의 이론적 전망을 들 수 있다.

프로이드에 따르면 전통적으로 가정의 질서와 안정은 가부장적 권위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한 때 가부장은 가족내의 모든 문제, 예컨대 생계문제, 교육문제, 종교문제, 기타 인간의 삶에 관련되는 거의 모든 분야를 관장했다.

그런데 전통사회가 무너지고 근대산업사회에 접어들면서 이제 가부장은 가정밖에서 가족들의 부양에 필요한 소득을 벌어들이는 기능인으로 전락하게 되고 전통적으로 가정내에서 가부장이 도맡아 수행하던 많은 기능과 역할이 크게 축소되면서 가족내에서의 가부장의 권위가 떨어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그 결과는 전통적인 가족구성원간의 결속관계가 크게 손상되는 일이다.

이런 상황에서 최근에 가부장들의 가족구성원들에 대한 불만이 증폭되고 있다는 얘기는 충분히 수긍할 수 있게 된다.

예컨대 모회사에 근무하는 40대 초반의 어느 가부장의 하소연, 즉 국민학교 6학년짜리 딸이 옷차림에 관해 타일렀더니 자기 말은 들은체도 않더라는 얘기는 실감있게 들린다.

그런가 하면 그의 부인도 자신을 근면하고 성실한 남편이라고 인정하나 가슴속으로는 따뜻한 사랑을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 같음을 느끼고는 직장에서의 성공만을 위해 앞만 보고 살아온 자신이 「헛 살았구나」하는 후회가 간혹 엄습해 온다는 이 가부장의 푸념은 바로 「아버지 부재 시대」의 비극을 나타내는 하나의 예에 지나지 않는다.

어린이나 주부의 입장도 마찬가지이다.

중상층에 속하는 부유한 가정의 어느 가정주부가 요즈음 「왜 사는지 모르겠다」는 회의속에서 인생의 의미를 재확립하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는 사례는 한국가정에서의 주부들의 위기의식을 잘 나타내어 주고 있다.

대기업체의 이사로 있는 남편은 업무에 바빠 늘상 늦게 귀가하고, 그동안 정성을 들여 길러놓은 대학 다니는 남매는 자신의 조언이나 충고에는 귀도 귀울이지 않고, 그럴 때마다 소외의식과 무력감에 빠져든다는 이 가정주부의 고민도 희귀한 것이 아닐 것이다.

더구나 인간활동의 가치를 돈으로만 측정하려는 현대사회의 황금만능주의 풍토에서 정당하게 평가받지 못하고 있는 가사노동에만 종사하는 이 주부의 생에 대한 회의 또한 한국적 상황에 의한 자연스런 반응일 것이다.

노인들의 위기의식에 대해서는 아예 언급조차 하지말자. 그리고 지금 얘기한 것들이 한국의 가정위기의 징표라면 이제 이 문제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에 대한 대답이 요구된다.

어차피 옛날의 전산업사회로 돌아갈 수 없는 처지일진대 지금 우리가 모색하고 있는 가정의 위기, 그리고 나아가서 이 사회의 난국을 극복하는 길은 이 사회를 병들게 하고 있는 불신주의에서 벗어나서 인간중심주의의 사상을 회복하고, 이제는 가부장적 전통적 권위보다는 가족 개개인의 주체성과 독자성을 인정하는 가운데 새로운 역활관계와 인간관계를 형성해 나가는 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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