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때는 이른바 ‘침묵과 낙하의 해’였다.

학생 시위의 현장에 전에 없던 새로운 양상으로서 침묵 시위와 투신이 등장한 것이다.

6월, 어느 화창하고 아름다운 날이었다.

오랜만에 학교 앞에서 친구들과 희희낙락 놀고 들어오니 학교 분위기가 영 뒤숭숭했다.

동창회관에서 ‘낙하 미수’사건이 있었던 것. 그때부터 그 사건을 포함하여 그 즈음에 일어난 일련의 시위 사건에 대한 보도 수위를 정해야 하는 학보사의 입장 때문에 갈등이 시작됐다.

의식 없이 친구들과 수다를 떠느라 ‘낙하 사건’의 현장을 지키지 못했던 나는 그 사실을 스스로 큰 과오로 생각하게 됐다.

그래서 평소보다는 훨씬 강경하게 대처했는데도 결국 도저히 양보할 수 없는 선에서 다른 기자들과 대립하게 됐다.

신문을 휴간하는 한이 있더라도 밝힐 건 밝히자는 강경파 후배들, 어떤 일이 있어도 우리 손으로 신문을 휴간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나의 주장이 팽팽하게 맞서게 된 것이다.

난 그때 선배들에게 걱정을 끼칠 정도로 유약하기 짝이 없는 편집장이었다.

연일 징징 울며 다녔고 내가 약한 모습을 보일수록 후배들은 더욱 기세가 등등해졌다.

바로 그때 생각난 사람이 전임 편집장 전여옥 선배였다.

여옥 선배는 내가 갈등하고 고통당하던 그 주말 집으로 전화를 걸면 마치 내 전화를 기다리고 있던 사람처럼 바로바로 전화를 받아 조언을 해줬다.

그중 가장 기억나는 대화를 하나 소개해 본다.

“편집장인 나는 A가 옳다고 생각하는데 다수가 B라고 주장할 땐 어떻게 해야 합니까?” “당연히 네 뜻인 A로 밀고 나가라. 그러나 반드시 다수를 설득해라.” 물론 그때 나는 설득에 실패를 하고 A도 B도 아닌 어정쩡한 결정을 내리고 말았다.

그러나 기자직을 퇴임하고 대학을 졸업한 후까지도 선배의 그 한마디는 계속 내 맘 속에 깊숙이 자리 잡고 남아 있었고 어느새 선배의 그 말을 내 인생의 이정표로 삼게 됐다.

직장 생활을 하면서 어느 조직에서나 그런 갈등은 끊이지 않았고, 지위가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다양한 의견 가운데 나의 결단을 기다리는 일이 많아지게 됐다.

나는 소신에 따라 당당하게 내 의견을 피력했고 부단히 다수를 설득했다.

물론 그래도 안될 때는 깨끗이 다수의 뜻에 승복했지만 그래도 대부분 내 뜻대로 일이 움직여 나가게 됐다.

이대학보 48주년 기념호에 실을 원고 청탁을 받고 20대 초반의 내가, 나의 열정이 새롭게 기억 속에서 되살아났다.

‘내가 죽어 일이 해결될 수 있다면 기꺼이 죽겠다’고 눈에서 불을 뿜고 나서던 그런 열정은 이제 사라지고 없다.

하지만 선배의 한마디와 그 때의 열정을 밑거름 삼아 꾸준히 가꾸어 온 나 자신의 인생이, 학보사에서 고생(?)했던 그 세월에 대한 훈장이 아닌가 싶다.

인생의 가장 값진 훈장을 안겨준 이대학보에 감사를 드리는 것으로 축하의 인사를 대신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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