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천득]수필집 "인연" "수필은 청자연적이다.

수필은 난이요, 학이요, 청초하고 몸맵시 날렵한 여인이다.

" 덕수궁 박물관에 간 적이 있다.

그 곳에서 본 청자연적의 단아함과 우아함이란 이루 형용할 수 없다.

피천득의 수필집 "인연" 또한 그가 묘사한 청자연적처럼 군더더기 없고 소박하면서도 잔잔한 여운과 감동을 선사한다.

또한 이 작품에는 고고한 난의 정신이 너무나도 깊게 베어있다.

추운 겨울에도 홀로 외로이 피어있는 난, 하지만 그 향은 산 전체를 향기에 물들이고 그 옆을 지나가던 짐승들에게도 향기가 밸 수 있는 그러한 난 말이다.

스무살의 평범한 여대생에서부터 할머니, 할아버지까지 두루 이 수필에 열광하는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가 아닐까. 띄어읽기가 참으로 어려운 작품이다.

"만연체"라서가 아니라 어떻게 읽느냐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인생은 사십부터란 말은 곧 인생은 사십이면 끝난다는 말"이라고 하면서도 자신이 육십의 늙은이이기 때문에 느낄 수 있는 젊음 의 싱그러움과 봄맞이의 감동을 다행스럽게 여긴다.

그로 인해 독자는 단지 작가의 경험에 공감하는 데 그치지 않고 끊임없이 회상하고 생각하게 된다.

직접 보이지는 않지만 작가와 독자사이에 쌍방향 커뮤니케이션을 이루는 것이다.

산문체의 수필이 긴 하지만 읽고 있노라면 마치 한편의 시를 읊조리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된다.

이는 아마도 언어의 미학을 잘 살린 다양한 비유와 묘사 때문일 것이다.

"오월은 금방 찬 물로 세수를 한 스물 한 살 청신한 얼굴이다.

하얀 손가락에 끼어있는 비취가락지 다.

" 라는 구절에서처럼 일반인들이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사물에 의미를 부여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아!" 하고 찬탄하게 만든다.

"인연"은 1996년에 단행본으로 출간되었고 2002년에 다시 새롭게 출간되었다.

이 작품이 이토록 오랜 생명력을 갖는 까닭은 간결하고 부드러운 문체와 소박하고 정겨운 언어로 담아낸 섬세한 일상의 풍경에 있다.

누구나 감지하는 계절의 변화에 의미를 부여하고 "종달새"와 같은 주변 자연물의 아름다움을 예찬하면서 인생의 향 취를 뿜어낸다.

또한 "잠"이나 "술"과 같은 생활 속 작은 것으로부터 느끼는 행복이나 고민을 담아내면서 잔잔한 감동을 선사한다.

사람은 누구나 어머니 혹은 딸과 같이 세상사의 인연을 실감케 하는 존재들을 만나면서 살아가는데, 작가는 아사코와의 인연을 추억하면서 "그리워하는 데도 한 번 만나고는 못 만나게 되기도 하고, 일생 을 못 잊으면서도 아니 만나고 살기도 한다"며 허탈감을 표현하기도 한다.

이처럼 이 작품은 낭만에 무덤덤하고 여유를 상실한 현대인에게 안식의 시간을 건넨다.

작가는 사랑하는 딸 "서영이"를 외국으로 유학 보낸 뒤, 딸이 갖고 놀던 인형 "난영이" -하버드대 연구교수로 갔다가 딸을 위해 사온 서양인형- 를 보살핀다.

날 마다 낯을 씻겨 주고 일주일에 한두 번씩 목욕을 시키고 머리에 빗질도 해 준다.

작가의 세례명이‘프란체스코" 라 했던 것이 떠오른다.

중세시대의 성자인‘아시시 의 성 프란체스코는 자기의 설교를 들어주는 사람이 없어서 물고기들 앞에서 설교 를 했다.

물고기들이 새까맣게 모여들었다.

작은 생명과 사물에게도 널리 사랑을 전 하는 존재라 그의 또 다른 이름도 "프란체스코"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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