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 문명이 판을 치고 있는 나라에서 노동자계급은 이상한 광증에 사로잡혀 있다.

이 광증은, 2세기 전부터 불쌍한 인류를 몹시 괴롭히는 개인적이고 사회적인 불행을 자기 뒤에 질질 끌고 다닌다.

이 광증은 노동에 대한 사랑, 즉 개인과 그 자손의 생명력조차도 고갈시키는 노동에 대한 빈사 상태의 정열이다.

성직자·경제학자·윤리학자는 이러한 정신착란에 저항하기는 커녕 노동을 지극히 신성화하였다.

’ ­「게으를 수 있는 권리」중에서­ 가끔은 누구나 집에서 하루종일 잠만 자고 빈둥거리길 기원해 본다.

노동을 경시한다, 귀찮다, 노동의 신성성을 해치겠다느 ㄴ의미가 아니라 인간이기 때문에 지친 자신을 쉬게하고 싶은 욕망이 생기는 것이다.

하지만 쉬고 싶다는 소박한 욕망마저도 역시나‘나태·게으름->사회의 해악->제거대상’으로 연상되는 사회의식 구조 앞에 감히 ‘나 놀고 싶소’라고 입밖에 내지 못한다.

“개으를 수 있는 권리를 다오!” 노동을 통제하는 권력의 자본가들이 들으면 이 무슨 새로운 쿠데타의 조짐인가 의심하고 당장 그 감시 안테나를 곤두세우리라. 늘 생산적인 일거리를 찾아 헤매는 우리들에게‘당신 한번 게으르게 살아보지 않을려우?’라고 묻는다면 아마도 난 아직은 제대로 살고 싶다며 자신이 혹여 나태한 인간으로 찍힌건 아닐까 하는 걱정에 내일부터 더 열심히 자기 노동력을 맹가동할지 모른다.

인간은 왜 일을 해야 하는가란 질문조차‘쟤 뭐냐?’란 비난의 눈길을 받는 사회, 그 노동의 성역에‘Anti 노동’브레이크를 걸겠다.

일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당위가 아니라 현실속 노동의 의미, 그 역활에 대한 Anti이다.

인간의 노동은 불복종이라는 원죄를 씻기 위한 의무임을 위대한 바이블은 명기하고 있다.

현대 국가의 헌법은 국민의 4대 의무 중 하나로 근로의 의무를 들고 있다.

의무라…. 사회가 쉬지 않고 굴러가기 위해 누구라도 일을 해야 하는데 지금처럼 노동 자체를 기쁨이 아닌 고통스런 삶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인간들에게 공평하게 일을 해야 한다는 사실을 주지 시키려는 의무가 아닐까. 본디 노동의 어원은 고문도구, 즉 고통(tripalium)에서 기원한다.

영어 ‘work’는‘창조하다’의 뜻이고‘labor’는 ‘고통스러운 일을 한다’는 상반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런 사실은 work와 labor를 혼용하는 현대인들에게 그리 큰 감흥을 주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노동의 의미가 구분돼 왔다는 역사적 근거를 통해 분명한 사실 하나는 확인된다.

적어도 과거에 노동(work)을 노동(labor)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던 당시의 사람들은 노동(labor)이 왜 고통스러운지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다는 점이다.

단지 먹고살기 위한 방편으로 일자리를 찾고, 노동을 찬양하면서 그 노예가 되어가는 현대인들에게 이는 일말의 희망을 던져주는 키워드이다.

「게으를 수 있는 권리」의 저자 폴 라파르그가 단적으로 지적하듯 노동사회는 “담배르 ㄾㅐ우며 태양 아래서 한가하게 빈중대는 행복한 나라를 찾아서 기차 선로를 놓고 공장을 세워 저주받을 노동을 수출”하고 있다.

자본주의 노동 구조는 노동자를 하나의 객체화시키고 있다.

“일하라 일하라”끊임없는 강요에 노동자는 쉬지 않고 무언가를 지속적으로 생산해 낸다.

하지만 넘쳐나는 생산물 속에서 자신의 모습은 없다.

일을 하고 휴식을 할 때조차 다음 단계의 노동을 위한 막간 준비 휴식일 뿐이다.

이 사회는 보다 강도 놓은 생산력을 위해 회사에도 나오지 말고 잠자는 시간에도 일을 고민하라고 한다.

사람들은 채워지지 않는 노동의 허전함, 무기력함을 보다 값비싼 소비·여가·레저를 통해 해소하려 한다.

남편의 피로를 풀기 위한 강장제가 아침이면 동나는 현실, 결국은 노동을 덜 하고 그만큼 소비를 위해 진을 빼지 않아도 되는데 사람들은 노동을 할수록 더욱더 물질적 정신적인 가난을 경험하고 있다.

이러한 무서운 경제적 공포는 사람들을 자본주의 생산의 구조속에 지속적인 노동과 소비를 강요하고 있다.

정작 과정을 통해 산출된 잉여는 자본가의 배를 부르게 해줄 뿐인데. 이것이 우리가 늘 새벽같이 일어나 밤늦게 일하면서 얻은 전부이다.

일하지 않는 자 밥먹지 말아야 하고 게으름을 최악의 덕목으로 삼고 뜻을 받들어온 가여운 노동자들이 사는 세상이다.

세계는 이제 자본주의에 잠식되다 못해 무한 경쟁 신자유주의 대열에 께여 현잔 노동자들은 화이트 칼라가 겪지 못하는 사회에서 한 등급 낮은 노동자로 매겨지고, 사무직 노동자들은 경제한파가 몰아칠 때마다 언제 짤릴지 모르는 자신의 직작을 두고 어디론가 떠날 철새 마냥 전전긍긍하고 있다.

이러한 문제는 노동자 당사자 뿐만이 아니라 그들의 가족들을 같은 구렁텅이로 몰고 있다.

아리들은 장래에 대접받는 노동자가 되기 위한 공부에 잠을 설치고 직장이 있는 사람들은 불안한 경기에 언제 잘릴지 몰라 자발적인 공포에 숨을 죽이고 있다.

당장 오늘 신문만 뒤져봐도 노동자들이 투쟁가를 부르며 파업을 감행하고 구조조정의 칼날이 나의 직작에는 다가오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에 온통 답답한 얘기들 뿐이다.

인간 삶의 안위를 가져오겠다고 호언장담하던 우리의 노동은 어디로 갔는가. 어째서 우리는 삶을 윤택하게 하고 마음을 살찌워줄 즐거운 노동을 할 수 없는 것인가. 노동의 세기는 고통과 불행의 세기이다.

이제는 게을러지자. 더이상의 황홀한 노동, 자신이 진정으로 하고싶은 일을 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노동을 열망하지 말고 자신이 행복할 수 있는 노동의 실체를 열망해야 할 것이다.

오! 게으름이여, 이 오랜 고통에 자비를 베푸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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