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 노동, 그 괴리의 역사

왜 노동을 하느냐고 물으면 대부분은 먹고살기 위해서 라고 답한다.

또한 ‘노동’하면 떨치기 힘든 억압적 뉘앙스에 부정적인 이미지를 떠올리기 마련이다.

성경에서 노동을 신에 대한 인간의 불복종의 죄로 인간이 받는 저주와 천벌의 결과로 여겨 “고된 일을 함으로써만 너희들은 땅으로부터 양식을 벌게 되리라”고 말했든 생계를 위해 일하는 것은 태초부터 인간의 숙명이었는지도 모른다.

루터와 칼뱅에 인해 노동의 관점과 사회에서 노동이 가지는 가치에 대한 관점은 변화를 겪게 되었다.

루터에 의해 노동의 관점과 사회에서 노동이 가지는 가치에 대한 관점은 변화를 겪게 되었다.

루터에 의해 노동은 신이 인간에게 바라는 고통의 일부로서 육체적인 생존을 위해 필요한 인간의 노고와 투쟁이란 관점을 벗어나, 도덕적 자기확신의 지배적 수단으로 인정받게 됐다.

심지어 칼뱅은 노동은 삶의 주요 목적이며 궁극적으로 우리를 구제해 준다고도 말했다.

현재 자본주의를 지향하는 사회의 본질은 노동을 모든 가치의 원천으로 보는 노동에 대한 프로테스탄트적인 교리에 상당부분 기초하고 있다.

한편 18세기부터 종교적 의미에서 벗어나 노동을 경제적 철학적으로 고찰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아담 스미스는 노동은 인간의 실존조건 그 자체라고 언급했고, 마르크스는 자본론을 통해 노동은 동물의 행위와 달리 자연을 변화시키고 나아가 자신의 잠재적 능력도 발전시킨다는 점에서 인간의 의지를 강조함으로써 노동의 중요성을 부여하기도 했다.

산업혁명을 기점으로 노동에는 일대 변화가 초래된다.

기계의 도입은 노동자의 노동을 덜어주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기계가 강요하는 작업리듬에 복종하도록 해 단순한 기계의 연장물로 머물게 만드는 위험한 단계로 넘어서도록 했다.

노동자들은 서로 교환될 수 있고 숙련기간은 단축됐으며 노동력도 평가절하됐다.

이후 노동자들은 생산수단을 박탈당했고 그 결과 상품화된 노동쳐ㄱ의 판매, 제조된 생산물에 대한 노동자의 통제력 상실, 생산과정에서의 주도권 소멸 등으로 극심한 소외 현상을 겪게 됐다.

마르쿠제는 「소련 마르크스주의」에서 노동 그 자체가 며예와 영광이며 사회주의에서 모든 노동은 창조적 성격을 가진다고 노동을 찬미하며 도덕적 가치부여를 주장했으나 이는 노동에 대한 비판의 근거를 제거하는 데 그쳤을 뿐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실패했다.

자본주의를 통해 증가된 생산성은 사회 전체의 생활수준 향상으로 이어졌다.

현대사회의 급격한 기술 발달로 인해 노동은 점점 전문화되고 기계회됐지만 한편으로 기존 노종자의 대량 실업을 초래했다.

이러한 실업에는 첨단 직업도 예외가 아니고 새롭게 창출되는 일자리는 저임금직이거나 임시직이 대부분이여서 노동자들을 더욱더 암울하게 만들고 있다.

침체된 임금, 임시직 노동자 증가, 장기적 실업 증가등의 문제는 사회내의 범죄와 폭력을 급증시키고 있다.

제3산업혁명이 경제 전반에 확산됨에 따라 제조업과 서비르 부문의 자동화와 그로 인한 블루 및 화이트 칼라 실업, 범죄는 더욱더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이런 상황에서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노동시간의 단축과 노동조건 개선 등 노동의 인간화를 농하기 앞서 자신의 생존을 위해 일자리르 ㄹ찾아 생존 경쟁에 내던져질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

즉 ‘공장 문 앞에서 민주주의는 멈춘다.

’는 오랜 진리(?)처럼 자신의 생존이 달린 문제에 있어 노동의 인간화를 논하는 것은 어쩌면 평범한 노동자들에게는 평생 꿈꿔볼 수 없는 사치일런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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