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버 공간에서는 소위말해 ‘백수’들의 점령지가 늘어나고 있다.

이른바 백수들의 커뮤니티를 지칭하는 모임이 수 천 개를 넘어서고 있다.

소수들의 보금자리 역활을 해왔던 사이버 공간은 다시 한번 자의이던 타의이던 노동거부를 하고 있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펼 수 있는 장소다.

그러나 온라인은 다만 그들에게 오프라인과 달리 기죽지 않고 자리잡고 앉을 방석 하나 내주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제 사이버의 새로운 패러다임은 현실의 네티즌을 ‘노동없는’동산으로 이끌고 있다.

흔히 사이버 문화의 가장 큰 특징으로 리얼리티의 결여를 꼽고 있다.

리얼이즘은 세계를 이원론으로 보기 시작하면서 즉 일과 놀이를 구분하면서부터 발전해왔다.

17세기 자본주의의 발전 이후로 지금까지 리얼리즘은 문화의 중심 축이었다.

리얼리즘은 고통스런 현실과 유쾌한 이데아를 분리하는 기제였다고 사이버 문화평론가 김우필씨는 지적한다.

그는 고된 노동에 시달리기 시작한 18세기 이후부터 놀이는 일과 분리되어 놀이는 일뒤에오는 문화라는 형태로 인간의 고통을 달래는 이데아 노릇을 해왔다고 한다.

그러나 모더니즘의 해체와 함께 사이버 공간은 리얼리티의 신화를 비집고 들어온다.

사이버 문학은 다시 중세의 환타지로 거슬러 오른다.

즉 일과 놀이가 단일화되는 접합을 경험하는 것이다.

노동은 정보를 수집하는 행위이며 놀이는 정보를 공유하는 행위라고 김우필은 말한다.

사이버 공간에서 네트워크는 무상으로이뤄진다.

그동안 산업사회가 교환을 통해 이윤을 남겨 유지되었다면, 노동과 일의 구분이 없는 사이버 공간은 굳이 이윤의 차익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일과 유의 그리고 일상이 혼재된 현실성의 결여는 고된 노동자체에 대한 당위성을 거부할 수 밖에 없는것이다.

사이버 공간에서 노동하지 않는 자에 대한 낙인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노동이 삶의 보편적이고 절대적인 가치가 된 이후로 사람들은 ‘실업자’내지는 ‘백수’라는 말로 노동하는 자와 하지 않는자를 엄격하게 분리해 왔다.

합리주의가 이성을 강조하면서 사회 안에 자연스럽게 편입되어 있던 광인을 구분하고 격리시켰다면 노동의 숭배 역시도 같은 색출과정을 밟아왔다.

실업자 내지 백수로 분리된 자들 역시 ‘노동신화의 사회’속에선 또 다른 광인으로 전락 할 수 밖에 없다.

실제로 일부의 실업자들은 생계를 잃음과 동시에 거리의 부랑자가 되거나 때론 정말 이성을 잃기까지 한다.

동시에 노동에서 거부된 그들은 그 존재만으로 여타의 노동자들에게 노동에 대한 열병에 사로잡히도록 만들기에 충분했다.

다른 실업자란 광인이 되지 않기 위해 일을 달라고 조르고 있다.

그러나 사이버 공간에서 백수들은 좀 더 거부감이 거세된 의미로 전달된다.

마치 사이버 공간에서 광기가 엽기라는‘쿨’한 문화적 현상으로 자리잡았듯 말이다.

사이버 공간은 금기에 대한 유연함과 가치전복을 불러오는 동시에 그동안 절대적인 가치라고 믿어 왔고 강요받아 온것에 대해 안티를 걸게 된다.

물론 사이버 공간은 현실과의 괴리 내지는 현실과의 공유를 무시할 수 없다.

당장 손 털고 일어서자는 노동거부가 아닌, 오프라인에선 의심의 여지조차 없던 가치관을 사이버의 패러다임은 서서히 뒤집고 있다.

노동을 거부 하는 쿨한 네티즌들은 노동의 광신도들은 비웃을 준비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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