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문화의 자화상

이화인, 지금 대학인으로 살아가는 이들에게 대학문화는 무엇인가. 상업문화로 대변되는 이대 앞 거리문화를 얘기하면서 대학문화라는 화두를 꺼내놓아야 하는 것은, 이대 앞의 문화가 더 이상 이화인의 주체가 아니더라도, 오히려 이화와 이화 앞이 더욱 단절되어 갈수록, 이러한 공간의 역설은 지금의 대학문화의 모순을 비추는 거울이기 때문이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이화와 이화를 둘러싼 공간과 문화의 정체성이란 고민을 밟아야 한다.

대학이란 공간에서‘문화’가 새로운 화두로 떠오른 것은, 대학가의 소비문화에 대한 경종의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한 90년와 그 시작을 같이한다.

학생운동의 빈자리 그리고 빈 시간을 대체해 줄 대안으로 문화라는, 즉 이젠 삶의 권리 이상의 삶의 질이 문제되기 시작했고, 이러한 놀이의 욕구가 맞물린 대학문화는 급속하게 상권에 대학가의 자리를 내주게 만든다.

지금의 대학인들은 문화평론가들에겐‘제대로 놀줄 모른다’는 비난을 받아야 한다.

우리 스스로는 문화에 대한 모든 욕망에 눈감아 버리고 있다.

대학문화는 이제 욕그 이상의 강박관념으로 다가온다.

우리에게 주어진 여분의 시간을 빈둥거리지 않고 시간이 부족하더라도 만들어서 문화적인 무엇인가를 해야한다는 의무감과 그로 인한 불안은 ‘대학문화’라는 신기루를 찾게끔 만든다.

대학생이란 사회적 위치가 쥐어준 대학생 스스로의 피해의식으로, 있지도 않고 있었던 적도 없었던‘대학문화’를 잡기위한 손짓을 허공에 뿌려야 했다.

매주 월요일 하교길의 이화인일 붙잡았던‘월요영화제’는 99년 30대 총학의 등록금 동결투쟁을 이유로 사라지다 시피했고, 2000년 31대 총학 역시 등록금 삭감투쟁을 이유로 단 2번의 상영에 그쳐야 했다.

이화의 상징으로 자리잡았고 호응도 좋았던 ‘월요영화제’였지만 영화제가 시행되지 않던 지난 2년간 큰 불편이나 목마름은 없었다.

기찻길 옆 비탈에 자리잡은 영화관은 없을지 몰라도 영화관은 어디든 얼마든 있다.

상업문화를 대학으로 들여와 아마츄어적으로 가공한 문화는 대학인은 끌지만 이것 역시 대학문화는 될 수 없다.

상업문화라는 손에 닿는 그리고 눈에 보이는 공간에 이들은 대학문화에 대한 요구를 대리만족할 수 밖에 없다.

대학인이 대학가 유흥, 상업문화의 원주체가 아니더라도, 대학생들이 상업문화를 향유하고 있단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굳이 신촌이 아니더라도 도심의 상업지구엔 대학생이 넘치고 오히려 수도권의 상업지구를 중심으로 부위별 지역문화로 분리되어 가고 있을 뿐이다.

지금의 이대 앞은 대학인의 상업문화로서의 자리마저 내주고 있는 것이다.

이화인의 생활공간을 떠나버린 이대 앞은 이화인들의 교육환경 운동의 목적마저 가져가고 있다.

우리가 찾던 대학문화는 더 큰 모순을 대학 앞에 만들어 놓고 있다.

대학문화 찾기가 상업자본의 논리에 말려 대학환경의 모순 만을 증폭 시켰다면, 진정한 대학문화란 무엇인가라는 문제로 다시 돌아가게 만든다.

90년 초부터 대학문화의 대안 그리고 이상을 찾으려는 노력이 대학가를 떠돌았다.

자생적인 민중문화에서, 일부는 저항정신으로 대변되는 하위문화에서 그리고 고급문화와 하위문화를 껴안는 전위문화에서 그 대안을 발견하기도 했다.

그러나 어떤 것도 지금 현재의 대학을 대변할 코드가 되진 못했다.

대학문화는 없는 것이다.

우리가 구해야 할 찾아야 할 문화는 이미 대학문화가 아니다.

어딘가 있을 것이라고 밖에서 찾아 헤메던 대학문화는 언제까지나 파랑새로 남을 수 밖에 없다.

지금의 모습이 이 자체로서 그것이 대학문화라고 밖에 말할 수 없다.

지금의 모순된 현실 속에서, 이화 앞에 이화인이 없더라도 우리의 공간으로 인식하는 것부터 대학문화 그리고 교육환견을 되찾는 첫걸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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