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랜드 앤 프리덤]을 보고

신림동에 가야했다.

학교 앞 그 많은 비디오방들을 놔두고 하필 고시촌 한 구석에 박혀있다니...행여 하는 마음에 눈에 들어온 비디오방으로 발을 옮겼다.

주인 아주머니는 신프로의 포스터를 붙이느라 문을 가로막고 서 있었다.

"그럼, 그 좋은 비디오가 없을 리가 있나." 자리를 잡고 샌드위치를 몇 입 베어무느라 그 좋은 비디오의 몇 분을 넘겨버렸다.

스페인 내전을 시작으로 비디오는 나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아나키즘에 대해 배울 수 있다기에 물어가면서 한 장면, 한 장면의 의미를 새기며 영화에 덤볐다.

이제와 새삼 힘들어 간 영화관람이 후회되지만, 그만큼 아나키스트도 공산당원도 스페인도 너무나 낯설었다.

1936년의 스페인. 소수의 대지주가 대다수의 농민을 지배하는, 아직 봉건사회에서 벗어나지 못한 나라. 17년 러시아에 사회주의 정권이 수립된 후 20년 동안 유럽 전역은 사회주의 열병을 앓는다.

36년 스페인 총선거에서 좌파세력인 "인민전선"이 승리를 거두자, 대지주, 교회 군관료를 중심으로 즉각 쿠데타가 일어나, 3년 동안 스페인 전역은 내전에 휩싸인다.

아나키스트, 노조원 그리고 세계각지에서 모여든 공산당원들 아니 분노한 젊은이들이 파시스트 정권에 대항해 마드리드를 비롯한 스페인의 지역들을 점령해 간다.

고지를 눈앞에 두고 하향곡선을 그리기 전, 켄 로치 감독은아나키 사회 그리고 그 가능성에 대해 차근차근 설명한다.

규율이 없이 치닫는 "혼돈"의 상태는 아니었다.

다만 그 과정을 지루하게 일궈낸다.

세계의 젊은이들이 모여 서투른 영어와 몸짓을 사용해 가며, 소규모 부대이자 공동체인 민병대 poum(품)을 만든다.

우선 그들에겐 적과동지를 나누는 유니폼이 따로 없다.

지도자라고 딱히 꼽을 만한 자에 대한 기억이 없다.

다만 아나키를 상징하는 흑색 베레모와 혁명을 뜻한다는 붉은 손수건엔 낯익을 체 게바라가 스쳐갔다.

대지주의 농지를 점령한 그들은 그 땅을 어떻게 나눌 것인지 농민회의를 연다.

교차되는 목소리에 중간중간 회의가 두절된다.

말다툼이 그리고 가벼운 주먹다짐이 오가지만 결국 모두들 한 마디씩 내뱉을 수 있었다.

"모두의 의견이 존중된다"는 켄 로치의 의도된 연출이 조금은 눈에 거슬렸다.

어쩌면 다른 방식의 사회에 대한 나 자신의 불신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난생 처음 "자유"란 것을 느낀다는 하녀출신의 여성, 그리고 매춘부 출신의 여인이 장총을 둘러메고 "그들"사이에 있었다.

사실 마지막까지 그들이 아나키스트인지 혼란스러웠다.

그들의 대화에선 단 하번도 "아나키스트"라는 단어가 오가지 않는다.

그들이 좀 더 권위적이라도 스스로를 "아나키스트"라고 명명했다면, 이런 의심은 애초부터 없었을 것이다.

중요한 건 "무슨무슨 주의자"의 행동강령이 아닌데...왜 그들이 그런 삶으로 걸어가야했는지, 그리고 그런 삶이 주는 "약한자" 들의 살아있을 가치였는데, 내내 아나키스트라는 단어에 구속되어 결국 단 한명의 아나키스트도 만나지 못한 채 그 곳을 나와야 했다.

지루하게 게릴라전이 지속된다.

반쯤은 지치고 반쯤은 즐기는 공동체 품의 생활이 이어지던 중 동료 하나가 전사한다.

그의 무덤을 덮은 후 "인터내셔널"가 모니터를 타고 나온다.

곡명을 알려 준 친구는 이미 따라 부른다.

30년대를 지키는 아니키들과 내 옆의 친구가 함께 노래를 부른다.

..선뜻 전율할 수 없는 묘한 기분이 스쳤다.

턱없이 부족한 무기와 식량에 조금씩 열세에 몰리기 시작한 민병대원들은 러시아의 탱크가 뒷산을 넘어와 해방시켜 주기를 고대한다.

괜한 기다림을 접기 시작할 대쯤, 스탈린에 대한 분노의 목소리가 오간다.

프랑스, 영국 등의 서방세계와 동맹을 맺은 스탈린은 그들을 동맹과의 신뢰를 쌓기 위해 그들은 선뜻 돕기 곤란하며, 민병대가 파시스트와 손을 잡았다고 음해한다는 얘기가 돌기 시작한다.

공산당원으로 민병대에 참여한 사람들은 정체성에 혼란을 느낀다.

일부는 남고 일부는 떠났다.

그리고 누군가는 돌아왔다.

공산당, 노조 그리고 아나키들 간에 한데 어울려 파시스트와 싸우던 그들은 각자의 이름 아래로 분열되어 간다.

전체주의 국가권력으로 귀결된 러시아 공산당에 대한 한계와 스탈린에 대한 켄 로치의 분노가 영상을 막바지로 몰아간다.

정렬된 유니폼, 상명하달의 스탈린의 부대는 부랑자처럼 누더기를 걸친 채, 어지러이 날뛰며 최후까지 의견이 엇갈리는 민병대원과 극적인 대조를 이루면서 대면한다.

"파시스트와의 내통죄"를 씌워 아나키를 숙청하러 온 부대엔 한솥밥을 나누던 동료가 총부리를 겨누고 있다.

그들의 마지막 장은 파시스트가 아닌 파시스트를 닯아가려는 공산당원의 총구에 의해 내려진다.

다시 2000년 서울이다.

켄 로치는 37년이 스페인을 95년에 다시 거내들었다.

2000년에 다시 꺼내들면서 연결고리를 나열한다는 게 위선처럼 느껴진다.

다만 영화속의 그들이 같은 하늘 아래 살다 갔으며 사고 있다고 믿고 싶어진다.

유은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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