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의 세계화 속에서 아나키즘이 하나의 대안으로 커나가고 있는 반면 그 이면 그리고 그 언저리엔 뿌리깊은 파시즘이 사히의 모순을 부둥켜 안고 있다.

표피적인 자유주의를 뒤로 파시즘은 더욱 거대한 헤게모니를 구축하고 있는게 지금의 또다른 현실이다.

815. 콜라캔에 프리린트된 이 숫자는 콜라가 일상의 단편이 돼버린 만큼이나, 건조한 일상의 코드로 "특별한 울컥임"을 바래가고 있었다.

2000년 8월 15일, 55번 째의 이 날은 이산가족 상봉을 앞두고 통일의 열병을 전하기 바빴다.

같은날 대부분의 일간지들은 일본의 신사참배와 관련기사 "읽고 분노하라"는 듯이 정치면에 장식했다.

이젠 낯익어 버린 분노와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감동을 짜낸, 하지만 아직도 극단의 감정을 자극한 이 사건들은 "파시즘" 이라는 공통분모를 두고 서 있단 것을 부정 할 수 없다.

야만의 20세기를 마감하면서 다 묻어버리고 온 줄만 알았던 "파시즘"은 21세기를 비웃기라도 하는 듯 이미 우리를 앞서 실존을 드러낸다.

일본의 내셔널리즘, 유럽의 네오 파시즘 그리고 박정희 기념관까지. 신자유주의를 볼모로 한 세계화에 대한 반발, 아시아 국가들의 경제위기 그리고 과학기술의 발달에 따른 정보화 사회로의 패러다임 변호는 19세기 말 당시 자본주의 국가를 떠돌던 "위기감"과 오버랩된다.

경제위기와 더해가는 빈부의 차 속에서 중산층은 무산계급으로 전락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과 동시에 사회개혁에 대한 무기력한 좌절감으로 인해 박정희의 무덤을 파고, 김정일을 스타로 만들었다.

그러나 이러한 파시즘은 이미 일상속에 거미줄처럼 걸쳐진 권위주의 그리고 차별에 근본적인 뿌리를 내리고 있기에 일상속의 파시즘은 더욱 절박하다.

지난 해 [당대비평]을 통해 일상적 파시즘의 문제를 제기한 한양대 임지현 교수는 "군부 파시즘은 가시적인 권력이라면, 일상의 미세한 국면에까지 지배권을 행사하는보이지 않는 규율, 일상을 조작하는 숨겨진 권력으로서의 파시즘이야말로 거시적인 테러"라고 지적한다.

가부장적인 가정, 권위적인 학교교육 그리고 전통이라는 이름의 문화적 타성까지. 이러한 일상에서 행사되는 권력들이 파시즘을 재생산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임교수는 학교에서 나타나는 "집단 따돌림" 현상을 규율이학생들에게 강제하는 자발적 복종의 극단적 결과로 보고 있다.

청소년들은 외적인 규율을 거부하면서도 또래만의 규율로 서로를 처벌한다.

임교수는 교사의 학생처벌이 교실에서 설 자리를 잃어가면서, 집단 따돌림 문제가 불거져 나온 것을 주목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가시적인 권력이 걷힌 자유주의 이면에는 자발적인 파시즘이 자리잡아 간다.

이동전화의 경우 번호를 부여받음으로서 체계속에 편입하는 일종의 존재수단이다.

이동전화를 갖지 못했기 때문에 모임에 초대되지 못했다면 "나"는 이동전화 네트워크에서 "부재"로 취급되는 것이라고 서강대 중문과 기김원 교수는 말한다.

이동전화의 "집단 따돌림"이란 본질이 가입수를 턱없이 늘려놓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근대 이후 키치의 패션으로 자리잡아온 대량복제품 즉 이미테이션은 유산 중산층의 상류층적인 상징들에 대한 동경과, 동일시에 대한 욕망을 불러일으켰다.

과거 이스트팩 가방의 범람과 최근 프라다룩의 물결은 이러한 대중의 심리를 대변한다.

상류층의 상징에 헤게모니를 부여하면서 그 권위에 당연스럽게 젖어들었다.

또한 또래중심적인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소외"와 "편입"을 이용한 상업전략이 크게 어필하고 있다 인터넷의 숨가쁜 확산 역시 이런 점과도 맞닿아 있다.

특히 "모교사랑"과 같이 현실공간과 밀접한 사이트의 성공은 이런 현상을 더욱 부채질 한다.

이러한 마케팅으로 성공한 대표적인 사례론는 ttl을 꼽을 수 있다.

허무주의적인 자유를 컨셉으로 내세우며 그 이면으로는 회원에 대한 특혜와 상업지구마다 출입을 제한하는 배타적인 공간을 세워 "상업화된 거대 파시즘"으로 자리잡았다.

유은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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