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입생의 얼굴,이름, 가족사항까지 미리 외워 평안남도 맹산은 고사리 마을과 같은 산속에 있는 벽촌이다.

아버님 김병두님은 면장일을 보셨고, 어머님 방신근님은 믿음의 힘으로 모든 어려움을 이기고 웃으며 살아가시는 분이셨다.

8살 되던해 봄 보통학교에 입학하신 션생님은 너무 기뻐서 새벽이면 몰래 학교에 갔다 문이 잠겨 다시 돌아오곤 하셨다.

보통학교를 마칠 무렵 온 식구가 평양으로 이사나왔을때 가정형편이 어렵게 되어 진학을 포기하고 삯바느질 하시는 어머님을 도와 살림을 하며 어린 동생들을 보살피셨다.

그러다 남보다 2년이나 늦게야 숭의여자중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어머님께서는 따님이 입학식에 입고 갈 검정 무명두두라미를 짓다말고 갓난 아기인 김옥영씨에게 젖을 물린채 그만 깊은 잠에 빠져 버렸다.

깜짝놀라 깨어보니 날은 훤히 밝아오는데 따님이 밤새 바느질을 해 마지막으로 동정을 달고 있더라한다.

그후 서문고교를 마치고 1940년 4월 1일 이화여자전문학교문과에 입학하셨다.

금년으로 50년이 되는 이화와의 깊은 인연이 시작된 것이니 학생때부터 기숙사에서 일을하며 학비를 보탰고 졸업후에는 이예 사감으로 발탁돼 6년간 근무하셨다.

사감시절의 선생님은 무척 엄격하고 무서운 인상을 주셨다.

신입생이 오면 미리 원서의 사진,이름 , 가족사항등을 따로 외워두셨다가 부모님과 짐을들고 들어오는 학생의 얼굴을 보자마자 「아무개 너는 몇호실로가」 하시는 바람에 학생도 학부모도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1949년에서 52년까지는 김활란 박사의 모교이기도한 미국 오하이오·웨슬레안대학교에서 기독교문학을 전공하고 부산 전시캠퍼스에서 첫강의를 시작하셨다.

역시 미국 템플대학교 대학원에 두번째 유학(1957~58년)을 다녀오신후 기독교학과과장, 학무과장, 학무처차장등 교내 중요보직을 두루 맡으시며 학사행정의 실무를 익히셨다.

그때까지만 해도 「김옥길 선생님」하면 검정두루마기에 두손을 푹 찌르고 캠퍼스 구석구석을 누비며 학생을 감독하는 무서운 선생님, 마음속까지 꿰뚫어 보는 듯하는 유난히 검은 눈망울의 주인공, 대강당 채플때 「2층 다 5열 무슨과 아무개 조용히 해」하시며 야단치는 교수 혹시 마이크가 꺼져도 쩌렁쩌렁한 육성으로 주의사항을 전달할 수 있는 분 정도로 학생들은 기억할 뿐이었다.

세번째 유학은 김활란 총장의 강권에 의해 준비하게 되었다.

5.16 이 일어난 해 9월, 학위를 하기위해 도미하려는 바로 그때였다.

혁명정부의 임시특례법에 의해 당시 62세인 김활란 통장이 갑자기 물러나셔야만 했다.

40세의 젊은 총장 1961년 10월 1일 김옥길선생님은 한국인으로는 두번째로 이화여자대학교 제 8대 총장직을 맡게 되었다.

유학계획은 취소되고 이화여자대학교 명예 문학박사 학위를 받으셨다.

40세의 젊은 총장은 패기와 열정으로 학교일을 해 나가셨다.

총장임기 6년을 세번-18년이란 세월동안 한국도 이화도 많이 발전하고 변했다.

취임당시의 이화에는 학생 8천명, 대학원하나, 7개 단과대학 31개학과가 있었다.

79년 퇴임하실때에는 대학원 2개 단과대학 10개, 50개학과, 학생수 1만명을 넘게 되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사립학교에 별 자유가 없었고 학생수도 나라가 정해주는 대로 따를수밖에 없었다, 선생님은 외적인 팽창보다는 내실을 다지는데 더 힘을 쓰셨다.

학문하는 대학을 지향하여 각종 연구소가 14개사 개설되었고 1971년에는 국내 처음으로 국제하기대학을 설립하여 외국인학생, 해외동포 자녀들을 교욱하게 되었다.

79년 세번째 임기가 끝날무렵 총장직을 물러나시겠다고 선언하셨다.

「누가 이화에 대해 말하면 내가 더 잘 아는 것같이 생각되니 오만해지고 한계를 느낀다」또는 「10년이 지나 아무도 내게 비판하는 말을 안한다.

힌가관의 장에게 반대의사를 말하지 안하게 되면 그 기관은 발전하지 못해」이런 말씀과 더불어 총장직을 후배에게 물려주실때 선생님은 59세이셨다.

그후 7년간 단 한번도 교문안에 발을 안들여 놓으셨다.

새 총장이 소신껏 일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다.

문교부 장관에서 「시골할머니」로 충청북도 괴산군 고사리마을에 완전히 이사 내려가신 것은 장관을 그만두시면서 부터였다.

꼭 10년동안 」시골할머니」생활을 하며 자연속에서 인생을 관조하시고 소박한 진리를 후배들에게 일러주시곤 했다.

1986년 가을 선임 김영의이사장님이 별세하신후 여러달후에애 학교법인 이화학당 이사장에 취임하셨다.

그냥 「고사리 할머니」로 남아께시고 싶으셨던 모양이다.

크고 작은 모임에서 기도인도를 하실때에는 언제나 「우릭에게 섬길 수 있는 조국과 몸담아 일할수 있는 이화와 사랑하는 가족을 허락해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로 시작하시던 선생님을 통해 우리는 조국과 이화와 가족을 섬기며 아끼는 법을 배웠다.

흔히들 환자는 투병을 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우리 선생님은 지난 1년 반동안 병과 싸우셨다기 보다는 병과 더불어 하루하루를 즐겁게 감사하며 살아오셨다.

그러나 1990년 8월 25일 오전 2시 55분 육체의 아픔을 벗으시고 평화로운 얼굴로 우리 곁을 떠나셨다.

동생 세븐-김동길교수 옥영님 수옥님등이「평범한 사랑으로 왔다 평범하게 가고싶다」던 선생님의 뜻을 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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