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총련 수배자 국민대 조현실 총학생회장을 만나다

한총련 수배자인 국민대 조현실 총학생회장을 만나러 국민대에 가던 11일(화)엔 가을비가 내렸다.

이제 더 추워질 텐데 5개월 가까이 학교에 갇혀 생활했을 조현실 총학생회장을 생각하니 가슴이 아팠다.

그러나 긴 수배생활로 지쳐있을 것이라는 생각도 잠시, 목욕바구니를 들고 재빨리 학내 샤워실을 갔다 온 그는 머리를 말리며 “5개월 가까이 동안 미용실에 가지 못해 커트 머리가 벌써 단발이 됐네요”라며 기자에게 웃음을 건넸다.

그는 지난 달 29일 이라크 파병 반대 농성을 벌이다가 쓰러져 병원에서 검사를 받는 도중 난소종양이라는 판정을 받았다.

병원측은 빨리 수술하지 않으면 위험하다고 했지만 학교 밖을 한발짝만 나가도 잡혀가는 한총련 수배자 신분으로 병원치료를 하는 건 모험이었다.

이런 안타까운 사연이 일부 언론을 통해 알려지면서 여론을 의식한 경찰은 치료 후 연행하겠다는 입장을 통보했다.

하지만 수술 후 사법처리하겠다는 경찰 앞에 그의 미래는 불안하기만 하다.

조현실 총학생회장은 자보를 붙이면서 하루일과를 시작한다.

현재 국민대는 단대 선거가 한창인데다 총학생회선거도 얼마 남지 않아 매우 분주하다.

그는 단대 건물마다 돌아다니며 직접 자보를 붙인다.

지나가던 친구들과 선·후배들은 “그러고 다녀도 괜찮아요?”라며 염려하지만 “죽지는 않는대”라며 웃음을 지어보인다.

그러나 기자에게 “한총련 수배자 중에는 부모님 임종도 못보는 사람도 있었고 동생이 죽어가는 앞에서 연행된 경우도 있었어요. 그에 비해 제가 받는 고통은 아무것도 아니죠”라고 말하는 그의 모습에선 씁쓸함이 묻어났다.

조현실 총학생회장을 힘들게 하는 것은 자신의 병이 아니라 한총련을 부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는 사회의 시선이다.

그는 “한총련은 부당한 일이 생기면 국민들에게 서명운동을 받는 등 평화적으로 운동을 시작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방식의 의사전달을 정부는 받아들이지 않기에 최후의 수단으로 극단적 방법을 취하는 거죠”라며 그들의 운동과정은 무시하고 극단적인 행동만 주목하는 사회의 시선을 안타까워 한다.

귀여움만 받고 자랐을 것 같은 앳띤 얼굴과 작은 체구는 한총련 수배자로서의 험한 생활과는 어울려 보이지 않았다.

이에 한총련에서 활동하게 된 계기를 물어보니 새내기 시절 법대 집행부로 활동을 하다 2000년에 매향리 미군 사격장 폐쇄 운동에 참여한 것이 시초가 돼 현재까지 오게 됐다고. 그는 “그 운동 이후 난생 처음으로 주변 사람들에게 눈을 돌리게 됐어요”라며 다른 사람을 위해 내가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는 기쁨이 그를 국민대 총학생회장의 자리까지 이끌었고 한총련 북부 의장까지도 맡게 했다고 말한다.

그는 “과거시절부터 우리 사회는 운동하는 사람을 소위 빨갱이로 인식하죠. 하지만 한총련은 후대에 더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것밖에 없어요”라고 덧붙였다.

우리나라의 반공이데올로기를 한순간에 깨기는 어렵겠지만 역사가 우리의 생각을 반영해 줄 날이 올 것이라는 믿음을 가진 그다.

자보를 다 붙이고 선거운동하는 학생들을 격려하다 보니 어느덧 하루도 다 끝나가고 있었다.

기자와 저녁을 하기 전 걸려온 어머니의 전화를 받는 그의 모습은 한총련 수배자라기 보다는 영락없는 귀여운 막내딸이다.

“제가 네 딸 중 막내라 부모님께서 특히 품안에 두고 싶어하시는데 이렇게 수배생활을 하는데다 병까지 얻어 많이 가슴 아파하세요”라며 “그래도 지금은 저를 이해해 주려고 노력하셔서 감사할 따름이죠”라고 전한다.

수업을 마친 학생들이 집에가는 시간, 그의 ‘집’은 총학생회의실 옆에 마련된 작은 생활방이다.

학교에서 처음으로 수배생활을 하던 날을 회상하며 그는 “그땐 아침에 일어났을 때 이곳이 집이었으면 하고 바랬어요”라고 말한다.

오랫동안 가지못한 자신의 방과 포근한 이불이 그립고, 언제 끝날지 모르는 수배생활이지만 학생회 활동에 파묻혀 살다보니 이젠 덤덤해지고 있다.

후회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그는 “가끔 힘든 건 사실이지만, 학생운동은 나에게 남을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와 값진 경험을 선물로 주었습니다”며 앞으로도 계속 운동을 해 나갈 것이라 포부를 밝혔다.

병원치료를 받은 후 학교에 다시 들어올 수 있을지 졸업 후에는 어떻게 생활할지 그에게 보장된 건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그는 “우리의 역할은 사회에서 아주 작지만, 같이 운동하는 사람들과 더 좋은 세상을 만들 수 있다는 믿음이 나를 버티게 합니다”며 사회에서도 우리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지 한번쯤 깊이 생각해줬으면 좋겠다고 소망을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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