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86F 전투기·B-52 폭격기·나이키 미사일·유엔군 추모패…. 서울시 용산구에 있는 전쟁기념관의 전시물이다.

전쟁기념관은 전사들 추모·전쟁영웅 찬미·적국에 대한 부정이 주요 모티브로 적용돼 전쟁을 ‘기념’하고 있다.

이런 전쟁유물과 무기 대신 우리 나라 어린이들이 이라크·베트남 어린이들과 평화를 꿈꾸며 주고받은 편지·그림을 전시하는 것은 어떨까? 이처럼 전쟁기념관 대신 평화운동 소품·전쟁의 고통을 재현해보는 체험의 장 등을 통해 평화박물관을 만들자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이 운동은 전쟁과 폭력에 찌든 우리의 삶을 성찰하고 마음 속에 평화의 씨앗을 키운다는 의미에서 출발한 것이다.

평화박물관을 설립하자는 목소리는 베트남전 당시 한국군에 의해 자행된 민간인 학살을 사죄하는 과정에서 처음 대두됐다.

이 때 문명금·김옥주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가 사죄의 의미로 베트남에 역사관을 건립하자며 8천만원을 기부해 한국·베트남의 평화역사관 건립운동이 본격적으로 출발한 것이다.

처음 의도는 베트남에 평화박물관을 먼저 설립하려 했지만 전쟁 가해자가 그 부당함을 우선적으로 깨닫고 평화를 추구해야 한다는 이유로 우리 나라 먼저 건립이 추진되고 있다.

이에 베트남전 진실위원회 대표 이해동 목사·한겨레 신문사 고희범 대표이사·전 서울대 김진균 교수(사회학 전공)·나눔의 집 일본군 위안부 이옥선 할머니가 공동대표를 맡고 평화박물관 건립 운동 추진 준비위원회(평추위)가 결성돼 주도적으로 이 운동을 이끌고 있다.

평화박물관을 위해 4천만원을 기부한 평추위 공동대표 이옥순 할머니는 “후대에는 우리와 같은 전쟁 피해자들이 생기지 않아야 한다”며 평화박물관을 통해 역사를 반추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같은 평화박물관 운동은 베트남전 참전에 대한 사죄와 화해운동을 기반으로 추진되기 때문에 역사적 반성과 화해의 의미가 더욱 보편화되고 심화하는 계기로도 연결될 것으로 보인다.

평화박물관의 전시는 ‘고통의 기억’에서 출발한다.

이 점은 전쟁기념관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 평화박물관은 ‘고통의 기억’을 분개와 전사자 영웅 찬미로 나가지 않고 자기 성찰과 연대감 확대를 중심으로 한다는 데에 차이가 있다.

고통이라는 끔찍한 경험을 다시 기억하면서 우리와 타인의 경계선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가능케 하는 것이다.

또한 분개심·전쟁 찬양과 같은 인식을 벗어나 폭력 앞에서 똑같이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들 간의 유대감 형성으로 나아간다.

이에 평추위 공동 사무처장을 맡고 있는 성공회대 한홍구 교수(사회학 전공)는 “전쟁기념관이 승자인 국가와 군인관점에서 비롯된 산물이라면 평화박물관은 전쟁 희생자의 다수인 민중의 관점으로 전쟁을 바라보는 것”이라며 전쟁을 바라보는 시선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평화박물관을 짓자는 운동은 우리 나라가 처음이 아니다.

20세기 초 스위스·네덜란드 등에서 평화사상가들에 의해 주창된 평화박물관은 헤이그 평화궁의 설립으로 처음 실현됐다.

이후 독일 베를린의 반전박물관·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안네 프랑크의 집과 이동식 평화박물관·인도의 간디 박물관이 생기면서 전쟁의 현장을 직접적으로 전시해 그 참담함 고취를 뛰어넘어 평화에 대한 열망으로 이어가고 있다.

최근에는 국제평화박물관 회의를 통해 다양한 평화박물관들의 상호연계와 협력 및 공동연구가 추진되면서 평화박물관운동은 국제적으로 전쟁박물관에 대비되는 뚜렷한 대안적 전시관 운동으로 부상하고 있다.

평추위는 올해 11월 사이버 평화박물관을 개관할 예정이다.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쉽게 시청각 자료와 문헌자료를 접할 수 있다는 점에서 큰 장점을 지닌 사이버 평화박물관은 앞으로 건설될 평화박물관의 제한된 전시공간을 보완하는 역할을 충실히 수행할 것이다.

또 앞으로 베트남에 생길 평화박물관을 비롯해 세계의 평화박물관들과 사이버상에서 서로 연계하여 홍보·참여·접근성면에서 시너지 효과를 낼 것으로 예상된다.

평추위 이수효 간사는 “학교·도서관·사무실 등 각각의 생활터전에서부터 평화에 대한 전시공간을 만들어 나가는 것이 평화운동의 첫걸음이다”라며 생활 속 시민참여의 중요성을 말했다.

앞으로 지역·사회단체·교육기관 등을 중심으로 작은평화박물관 설립도 추진하고 있어 이제 ‘평화’라는 개념이 더 이상 추상적으로 머물지 않고 우리 일상 속에서 쉽게 발견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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