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어머니. 성수가 이제야 돌아왔습니다.

” ‘망명객’ 김성수 박사는 전라남도 화순에 있는 부모님 무덤 앞에서 뜨거운 눈물로 인사를 대신해야만 했다.

꼭 33년만의 일이다.

보고 싶던 친지들, 고향의 흙내음…. 33년의 세월동안 얼마나 그리워했던가. 이처럼 그가 고국을 그리워 할 수 밖에 없던 까닭은 3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동양철학의 관점으로 서양철학을 공부하겠다는 포부를 품고 1968년 독일 유학을 떠났던 그는 자신도 모르는 새 북한과 내통하는 ‘간첩 딱지’가 붙어버렸다.

“1973년 한국 유학생 몇명이 호기심으로 동베를린의 북한대사관을 방문해 문제가 됐는데, 그 중 한 사람이 내 친구라는 이유만으로 누명이 씌워졌습니다.

” 그 일이 있은 후 14년이 지난 1987년 파독 광부 간첩단 사건에 또 다시 연루되면서 그는 두번째 ‘간첩딱지’를 달았다.

그는 억울했지만 국가정보원에게 붙잡히지 않기 위해 친구·친척집을 옮겨다니며 전전긍긍해야만 했다.

그렇지만 이대로 손놓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그는 송두율 교수 등 뜻이 맞는 유학생들과 함께 ‘민주사회건설협의회’를 결성하고 유신헌법 반대를 외치며 한국의 민주화를 위해 혼신의 힘을 쏟았다.

그 와중에도 학문을 향한 열정은 식을 줄을 몰라 철학공부를 꾸준히 계속했다고 한다.

결국 그는 프랑크푸르트 대학에서 동학농민운동과 독일농민전쟁을 비교해 박사학위를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30년이 넘는 긴 시간 동안의 타향살이는 서러움과 외로움의 연속이었다.

처음 몇 년 동안은 함께 민주화를 외치던 동지가 있어 어느 정도 이겨낼 수 있었지만 결국 그들도 하나 둘씩 떠나버렸다.

떠나겠다는 사람을 붙잡을 수는 없었지만 왠지 모를 씁쓸함이 그의 마음을 무겁게 하곤 했다.

다행히도 그의 곁에는 항상 부인이 함께 있었다.

“망명생활을 시작하면서 집사람도 마음고생이 심했을 텐데, 어려울 때마다 훌륭한 지지자가 돼줘서 고맙고 또 미안할 따름이에요.” 그래도 점점 깊어만 가는 고향생각을 그 무엇도 막아 주지 못했다.

“새벽 2∼3시쯤 갑자기 엄습한 고향생각 때문에 잠에서 종종 깨곤 했습니다.

가만히 있으면 미쳐버릴 것만 같아서 밖으로 나가 무조건 달렸어요.” 이제 그는 그토록 그리워하던 고향땅에 왔다.

고향의 산과 들을 만나 활짝 웃음짓는 그의 표정을 보니 어느덧 33년간의 고통도 모두 잊어버린 듯 하다.

가장 하고 싶은 일이 뭐냐는 질문에 “광주 무등산에 꼭 오르고 싶다”며 남은 기간 동안 등산·낚시를 실컷 하는게 소원이라는 김성수 박사. 그토록 오르고 싶다는 무등산에서 그가 한 걸음 한 걸음씩 발을 내딛듯이 사상의 자유까지도 보장되는 진정한 민주화도 한 걸음 한 걸음씩 올라설 그 날을 기다려 본다.

저작권자 © 이대학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