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쿤에서 온 편지 ‘No a la OMC’
칸쿤에서 온 편지 ‘No a la OMC’
  • 구정아
  • 승인 2003.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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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 a la OMC’는 WTO반대라는 뜻
한국에는 서늘한 가을 바람의 기운이 느껴지는지요. 이곳 멕시코 칸쿤은 WTO 반대 투쟁단의 열기로 후끈 달아오르고 있습니다.

이화인 여러분 안녕하세요? 저는 제5차 WTO 각료회의 저지 투쟁에 함께 하기 위해 멕시코 칸쿤에 와 있는 류미경이라고 합니다.

농민·노동자·교사·보건의료인·사회단체 활동가 등 2백여명이 칸쿤에서 함께 활동했던 1주일 동안의 경험은 우리 모두의 가슴에 남아 있습니다.

그 경험을 이화인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자 이렇게 펜을 들었습니다.

이곳으로 떠나오기 전 서울 시내 곳곳에서 진행한 거리캠페인을 시작으로 지난 6일(토) 범국민대회에서 부터 오늘 14일(일) 칸쿤 시내 중앙광장에서 열린 ‘WTO 각료회의 저지투쟁 승리 보고대회’에 이르기까지. 긴 시간동안 준비해왔던 우리들의 일정은 마무리되어가고 있습니다.

오늘밤을 지내고 나면 2백여명의 한국민중 칸쿤 투쟁단은 다시 한국으로 돌아갑니다.

그렇지만 WTO가 파괴하는 전 세계 민중들의 권리를 지켜내고 빈곤과 불평등을 양산하는 신자유주의에 맞선 우리들의 투쟁은 이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들도 한국의 TV나 신문을 통해 ‘WTO가 농민들을 죽인다’, ‘WTO에서 농업을 제외시켜라’라고 외치며 스스로 목숨을 끊은 농민 이경해씨의 이야기를 들어 보셨을 겁니다.

이곳에서도 그의 죽음에 관한 얘기는 뉴스와 신문을 가득 메우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의 죽음이 한국에서는 단지 하나의 놀라운 사건으로만 다뤄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의 죽음은 이미 WTO가 탄생하고 농산물이 수입개방 되면서부터 예견된 것일지도 모릅니다.

정부는 금융자본이 주도하는 세계경제 질서에 편입하기 위해 농업 포기 정책을 택했습니다.

그 여파로 부채에 허덕이다 농약을 들이켜 목숨을 끊은 수많은 농민들을 기억해 보세요. 이경해씨의 죽음은 우발적인 사건이 아닙니다.

WTO는 초국적 금융자본의 무한한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 식량을 비롯한 물·에너지·보건의료·교육 등 인간들의 삶에 필수적인 요소들을 상품으로 탈바꿈시켜 이에 대한 전 세계 민중들의 모든 권리를 빼앗아 가고 있습니다.

네슬레·델몬트같은 초국적 곡물기업의 판로를 넓히는 동안 토지와 물·종자에 대한 모든 권리를 빼앗겨 굶주리고 있는 제3세계의 농민들, 물이 사유화되어 목을 추기는 데에 어마어마한 돈을 지불해야 하는 민중들, 에이즈나 말라리아와 같은 전염병에 걸려도 비싼 돈을 내지 않으면 약을 주지 않는 초국적 제약자본의 횡포에 목숨을 잃어가고 있는 민중들…. 이들 모두의 권리를 파괴하고 목숨을 앗아가는 것이 바로 WTO입니다.

한국민중 칸쿤 투쟁단 200여명은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WTO 협상이 진행되는 것을 막고 민중들의 삶과 권리가 존중되는 대안적인 세계화를 만들어 내기 위해 이곳 칸쿤까지 온 것입니다.

한국 투쟁단은 멕시코 경찰들의 집중된 탄압에도 누구보다 앞장서 열심히 활동하고 있습니다.

본격적인 시위가 시작되기 전에는 각종 포럼에 참석해서 한국의 상황과 투쟁의지를 알렸습니다.

이경해씨의 죽음 이후에는 ‘5차 각료회의 중단’, ‘한국 정부 대표단의 철수’를 요구하며 그가 목숨을 끊은 장소에서 천막을 치고 매일 농성과 촛불시위를 전개했습니다.

13일(토) ‘국제공동행동의 날’ 시위에서는 각료회담장으로 진입하는 것을 가로막는 철조망을 뜯어내고 WTO를 상징하는 허수아비를 불태우는 데 성공했습니다.

몇명은 각료회담장 근처까지 달려가 ‘No a la OMC’(WTO 반대)등의 구호를 외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투쟁으로 한국 투쟁단은 세계에서 모여든 활동가들과 하나가 되었습니다.

이제 칸쿤 거리에서는 ‘안녕하세요’, ‘투쟁’, ‘WTO 박살’, ‘한국’ 등의 한국 말들을 어색한 발음으로나마 흔히 들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티셔츠를 입고 머리띠를 두른 해외 활동가들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한국 농민들의 꽹과리 가락과 멕시코의 젊은이들의 손으로 쳐대는 북소리, 그리고 우리의 어깨춤과 살사 스탭이 한데 어우러져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어낸 것처럼 한국 민중들의 투쟁은 지구 곳곳의 민중들의 투쟁과 하나가 돼 민중들이 중심이 되는 저항의 세계화, 대안적인 세계화를 만들어내는 원천이 될 것임을 확신합니다.

2003년 9월 14일(일) 밤 칸쿤에서 류미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