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에 있는 사람은 전원 체포하라!” 지난 18일(일) 오후4시 전라남도 광주 금남로에서 시민학살을 예고하는 신호탄이 울렸다.

당시 거리에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광주 시민들이 있었고 전두환을 비롯한 신군부세력의 타도를 외치며 민주화를 갈망하는 학생들의 시위가 한창이었다.

그러나 금남로는 이내 피로 얼룩지고 말았다.

공수부대는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금남로에 있는 사람이면 무조건 곤봉으로 얼굴을 짓뭉개고 군홧발로 온 몸을 짓밟았다.

흰색 투피스를 입고 외출하던 어느 젊은 여성은 옷이 찢겨 나체로 길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금남로 한 여관에서 투숙하던 젊은 여행객은 갑자기 들이닥친 군인들의 곤봉세례로 온 몸이 피투성이가 됐다.

택시를 타고 신혼여행을 가던 신혼부부도, 서점에 가던 고등학생도 이유를 알지 못한 채 주검으로 변해갔다.

마냥 지켜볼 수 없던 시민들은 19일(월)부터 무자비한 공수부대의 탄압에 맞서 싸우기 시작했다.

김태찬씨는 시민군과 함께 총으로 맞섰고 나명관씨는 ‘투사일보’를 만들어 공수부대의 만행을 적나라하게 밝혔다.

다방 DJ는 마이크를 갖고 거리로 뛰어나와 가두방송을 했고 부녀자들은 배고픈 시민군을 위해 주먹밥을 만들었다.

21일(수) 오후1시 도청 스피커에서 애국가가 울려 퍼지자마자 금남로에 있던 청년들이 하나 둘씩 쓰러져갔다.

군인들이 시민을 향해 사격을 시작한 것이다.

이에 시민들도 군용트럭과 총을 모아 시가전을 벌였고 오후5시30분 공수부대는 조선대로 철수했다.

그러나 공수부대가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는 상황. 폭풍 전야의 불안한 밤공기가 광주를 휩싸고 있다.

끝나지 않은 광주, 잊혀진 ‘투사’ 피비린내가 나던 광주에 23번째 봄이 돌아왔다.

그 동안 광주사태에서 광주민주항쟁으로 명칭이 바뀌고 1995년 전두환·노태우 등 시민학살의 전범은 역사의 심판을 받았다.

항쟁의 정당성이 밝혀지자 사람들은 죽은자들의 억울한 희생을 애도하고 5월정신을 기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정작 5·18 항쟁을 밑에서부터 이끈 민중은 역사의 평가에서 소외되고 말았다.

“광주민중항쟁 관련자 중 정당한 보상을 받은 사람은 10%밖에 안돼요.” 항쟁 당시 18세의 어린 나이에 시민군으로 활동했던 오기철씨는 현재 병원에 입원 중이다.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막노동을 하던 중 부상을 입었기 때문이다.

그는 항쟁 직후 죽은 동지들을 남겨두고 혼자만 살아 남았다는 죄책감 때문에 10년 동안 광주를 떠나 방황한 것. 이후 그는 살아남은 자로서의 책임을 느끼고 광주로 돌아와 전두환 처벌을 외치며 진상규명을 위해 투쟁했지만 돌아온 것은 가난과 사람들의 냉대뿐이다.

“어떤 이들은 5·18항쟁 그만 좀 울궈먹으라고 합디다.

언제적 5·18이냐고….”이런 그에게 정부는 단돈 4천만원을 보상했다.

당시 투사일보를 만들던 나명관씨는 항쟁 이후 폭도라는 누명 때문에 근 10년 가까이 사복형사에게 감시당하고, 일자리도 구하지 못했다.

“감옥에서 병신이 돼 나왔는데 어떻게 일을 해요? 5년 동안은 내 몸 추스르기에 여념이 없었죠.” 어떤 이는 경제적으로 어려운 살림에 부인에게 이혼당했고 어떤 이는 계엄군의 만행에 대한 충격으로 정신과 치료 중이다.

5·18 민중항쟁 동지회 사무처장 김태찬씨는 “아직도 많은 이들이 항쟁으로 인한 피해를 제대로 보상받지 못하고 있는 가운데 언론은 몇몇 특정인만을 영웅처럼 보도하고 있다”라며 광주민중항쟁을 재평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역사는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몫이다.

정당한 평가와 보상이 이뤄지지 않는 한 광주민주항쟁은 언제까지나 ‘현재진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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