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 바람이 유난히 매서웠던 13일(수) 여의도 시민공원 일대는 전국농민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상경한 농민들과 이들을 싣고 온 관광버스로 발디딜 틈이 없었다.

“아유 죽겄제라. 모종값이랑 비료값은 오르는데 농산물은 싸고…. 지금도 농사져 자식새끼들 학비 대려면 뼈 빠지는데 쌀 수입하면 우린 다 죽으란 소리제.” 전라남도 함평에서 올라온 박얼계(72)씨의 이야기다.

잘못된 농업정책으로 최고 3∼4천만원의 부채를 안고 있는 농민 앞에 기다리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값싼 수입 농산물. 그래서 이들은 ‘WTO 쌀 수입개방 반대와 한­칠레 자유무역협정 저지’를 내걸고 절박한 사정을 알려 정책에 반영시키기 위해 하루 농사를 접고 서울까지 올라온 것이다.

그러나 7만여 농민이 참여했음에도 불구하고 전국 ‘농민’대회에서 오히려 농민이 소외됐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왜일까? 대선후보들이 와서 농민정책에 대해 연설할 땐 더욱 그랬다.

참석하지 않은 이회창 후보야 말할 것도 없거니와 그 자리에 온 노무현·정몽준·권영길 후보들은 하나 같이 ‘농민의 아들로 태어난 것이 자랑스럽다’며, 농심(濃心)을 경청하기보다는 자신이 대통령이 되면 얼마나 훌륭한 농정(濃政)을 펼 수 있는지를 설명하기에 바빴다.

농민이 아닌 청중 대부분도 마찬가지였다.

옷까지 맞춰입고 와 자신이 지지하는 대통령 후보 연설 땐 큰 소리로 화답하며 박수치고, 타후보에게는 야유를 보내거나 심지어 어떤 이는 계란과 돌을 던지는 등 농민의 여론을 몰아갔다.

정작 농민들은 살을 에이는 추위 속에서 ‘비료값도 안 나오는 농사 따위’를 잊기 위해서 소주를 들이킬 뿐인데 말이다.

대부분의 언론도 농민들의 요구나 근본적인 해결책에 대한 조명은 뒤로한 채 이들로 인한 퇴근시간 교통 혼잡, 연설 도중 달걀 세례 등만을 보도했다.

여기저기서 농민을 위한다며 자신들의 실리를 챙기는 데 여념이 없는 이들에 의해 또 한 번 농민의 목소리가 묻히는 것은 아닌지 안타깝기만 하다.

저작권자 © 이대학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