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주에서 독립군 활동한 남자현

1931년 일제의 만주침략 조사를 위해 국제연맹이 파견한 조사단은 한 조선여인의 무명지(無名指) 두 마디와 혈서로 쓰인 독립청원서를 받게 된다.

이는 이들을 통해 조선의 독립청원을 세계에 알리고자 한 남자현의 결의에서 비롯된 것이다.

남자현은 1872년 12월 경북 안동 유생 남정한의 딸로 태어났다.

그는 1891년 남정한 문하 제자인 김영주와 결혼했지만 1895년 을미사변과 단발령에 항거하는 유생봉기 때, 의병으로 참여한 남편을 잃게 된다.

1905년 을사조약을 시발점으로 항일투쟁이 전국 각지에서 무섭게 일어나면서 남자현은 여성이라는 제약에도 불구, 직접 의병을 모집하고 일본군의 동태를 파악해 적의 후방을 교란시키는 등 중요한 일들을 해냈다.

당시 사람들은 이런 그를 ‘항일의 화신’이라 부르기도 했다.

그의 활동에 일본 순경들이 촉각을 곤두세우자 그는 1919년 3.1운동 때 중국 북경 지방으로 건너갔다.

그곳에서 그는 서로군정서에서 활약하는 한편 12곳에 교회를 건립하고 10개의 여성교육회를 조직해 독립운동 뿐만 아니라 여성계몽에도 힘썼다.

1920년경 해외 독립운동세력 내부의 분열 조짐이 보이자 일주일 동안 금식기도를 하고 혈서를 써 책임관계자들을 감복케 했다는 일화는 남자현이 독립을 위해 몸을 아끼지 않았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이외에도 그는 1922년 9월 국내로 잠입해 군자금 조달활동을 하고 1926년 4월에는 사이토 총독 암살을 기도하는 등 국경을 넘나들며 여느 남성보다도 활발한 독립운동을 펼쳤다.

이후 만주로 돌아와 1933년 만주 괴뢰정부의 일본장교 부토를 암살하려다 체포당한 그는 동지들을 위해 모든 책임을 혼자 뒤집어 쓰고 17일간 단식하며 끝까지 투쟁했다.

그러다 건강이 악화돼 병보석으로 석방됐으나 하얼빈에서 객사, 현재 그의 유해는 하얼빈 외국인 묘지에 안치돼 있다.

후대에도 그의 혼을 기리고자 1962년 건국공로훈장이 추서됐다.

안선영 기자 soleil81@ewha.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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