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일(금) 문을 열어 아직 사무가구도 다 갖춰지지 않아 휑해보이는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주노총) 법률상담원 사무실. 이곳에서 고집 세고 깐깐해 보이는 첫인상과는 달리 웃을 때 하얀 이가 드러나 아이같은 노동상담가 권영국 변호사를 만났다.

권영국씨는 지난해 12월 말 연수원 과정을 수료하자마자 법률상담원에 들어온 새내기 변호사다.

서른이 훨씬 넘어 공부를 시작해 39세에 늦깍이 변호사가 된 그가 조건 좋은 직장을 마다하고 이곳에 둥지를 튼 데는 뭔가 이유가 있을 법한데. 사연의 실마리는 그의 20대 중반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보일 듯 하다.

“처음부터 노동운동에 뜻이 있었던 건 아닙니다.

” 서울대 금속공학과 81학번인 권영국씨는 대학시절에도 노동야학에 2~3개월 참여한 게 전부일 정도로 노동운동에 그다지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러다 85년 풍산온산공장에 입사해 87년 6월 민주항쟁과 7~9월 노동자대투쟁을 겪으면서 불합리한 노동현실에 눈을 떠 운동에 뛰어들게 됐다.

이후 그는 자신의 사업장 어용노조 탄핵과 민주노조 결성을 위해 힘쓰다 해고와 복직을 반복하고 3년6개월 동안 두 번의 옥고를 치르고 수배생활도 해야 했다.

“처음엔 많은 이들이 노조 결성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지만 차츰 우리도 주인이 될 수 있다는 인식을 갖게 됐어요. 당시는 노동해방의 꿈, 미래에 대한 희망이 있어 행복했죠.” 그는 힘겨운 투쟁 끝에 안강공장에 노조 지부를 설립했을 때의 감동이 아직도 생생하다고 회상한다.

그러나 93년 2월 두 번째 출소 후, 그는 복직을 포기하고 새로운 길을 모색해야 했다.

군사정권 아래 해고된 노동자 5천여명을 일터로 돌려보낸다는 김영삼 정부의 약속에 그는 복직의 희망을 품고 93~94년 전국구속수배해고노동자원상회복투쟁위원회(전해투) 선전국장으로 활동했으나 끝내 복직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후 3년 동안 노력한 끝에 사법고시에 합격한 그는 당시 민주노총 권두섭 법규차장의 제안으로 다시 노동자의 곁으로 돌아오게 됐다.

“노동운동을 하면서 노동자들을 만나고 그들이 변해가고 기뻐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 행복했어요. 아직까지 노동운동과 인연을 끊을 수 없는 이유도 그때의 소중했던 경험 때문인 것 같아요”라며 춥고 배고팠던 시절을 결코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제는 현장에서 외치는 대신 노동자들 뒤에서 그들을 지원해주는 권영국씨. “얼마 안되는 지식이나마 노동자들이 갈 길을 찾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어 보람을 느낀다”며 과거 노동운동의 경험은 상담할 때 노동자의 처지를 이해하는 데 밑거름이 된다고 한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도 그를 필요로 하는 열악한 현실은 여전한가 보다.

그는 “비정규직 문제·정리해고 등으로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심해져 경제적 불평등은 그때보다 지금이 더 심각하죠”라며 안타까워 한다.

“다른 직업이요? 음… 법이 잘 지켜져 노동계에 더 이상 나 같은 사람 필요없다고 하면 그때 생각해 봐야겠네요.” 천진한 웃음과 함께 던진 유머 속에서 노동자들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겠다는 그의 열정이 엿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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