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북도 무주군 안성면 진도리. 고추 텃밭사이로 난 작은 길을 따라 발목까지 오는 나무대문을 뛰어넘으면 댓돌 위 흰 고무신을 장난감 삼아 놀고 있는 귀여운 새끼고양이와 만난다.

바람, 흙, 풀 그리고 허병섭씨 부부가 함께 사는 나무 툇마루와 억새풀 지붕의 집은 허병섭씨가 손수 만든 ‘작품’이다.

허병섭씨는 80년대 중반∼90년대 중반 서울에서 목사이자 빈민운동가로 활동하다 지금은 무주에서 생태주의 농부의 삶을 살고 있다.

그가 도시에서의 활동을 접고 갑자기 농촌으로 내려오게 된 데는 뭔가 사연이 있어보이는데. “빈민운동을 할 당시만 해도 도시문명을 하느님이 이룩한 사회구조로 보고 그 속에서 내가 할 일은 있다고 믿었었지.” 하지만 도시가 더이상 하느님이 아닌 사람이 움직이는 거대한 기계라는 걸 깨달은 후 생태적인 삶을 찾아 96년 이곳 무주 산골로 내려왔다.

“처음에 무주로 내려왔을 때 이웃 농부들이 고맙게도 아무런 댓가도 바라지 않고 농사를 가르쳐 줬어.” 처음 시작한 농사일이 힘들기도 했지만 그는 도시의 편리한 삶과 지위를 포기하고 시작한 무주에서의 삶을 인간미 넘치는 생활이었다고 회상한다.

그렇게 농사를 지은 지 벌써 6년. 쌀에서부터 참깨·감자·고구마 등 주식에서 간식거리까지 그가 재배하지 않는 작물은 없을 정도다.

까맣게 탄 피부와 밀짚모자를 눌러쓴 모습이 영락없는 시골농부이건만 그는 아직도 농사에서 배워야 할 것이 많다고 생각한다.

그에게 농사는 단순히 작물을 길러내는 것이 아니라 생명체가 또다른 생명체와 만나 유기적으로 얽혀있는 상호관계를 파악하는 ‘철학’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작물을 기를 때는 화학비료 대신 퇴비나 인분으로 땅을 기름지게 하고 잡초 하나도 함부로 뽑지 않는다고 한다.

“눈에 보이는 수확은 적을지 몰라도 이런 농사법이 ‘온생명’이 다같이 살 수 있는 ‘밀알농사’지.” 풀이 무성한 마당도 그의 생태철학이 배어있는 공간이다.

그의 철학은 농사 뿐 아니라 강연으로도 이어진다.

그는 생태마을 근처에 있는 ‘푸른꿈 고등학교’에서 ‘생태입문’ 과목을 가르치며 강연 요청이 있을 때마다 기꺼이 찾아가 생태적인 삶을 전하고자 노력한다.

“눈앞의 이익을 쫓으며 사는 사람들에게 미래의 환경터전을 보호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리려고 해”라며 “대학 내 생태운동도 많이 활발해졌으면 좋겠어” 당부의 말도 잊지 않는다.

농부의 삶을 후회해 본 적은 없냐는 기자의 조심스러운 질문에 ‘너무 편안한 삶을 살고 있어서 오히려 도시 사람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든다’는 허병섭씨. 모든 생명체가 더불어 살아가는 ‘하느님이 만든 세상’속 그의 미소가 벽에 걸린 판화 속 ‘텅 비어 있으면 남에게 아름답고 내게 고요합니다’라는 구절과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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