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명의 학생과 노동자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불합리한 현실을 타도하는 불꽃이 되기 위해… 박종철, 이한열 열사의 죽음으로 촉발된 87년 6월 항쟁과 그 시작이 비슷하다고 ‘제2의 6월 항쟁’이라고까지 불렸던 ‘91년 5월 대투쟁(5월 투쟁)’. 열사들의 죽음 앞에 분노한 수만 명의 외침이 연일 거리를 메웠음에도 5월 투쟁은 그동안 별다른 평가를 받지 못했다.

하지만 10년이 지난 지금 심포지엄, 문화제 등 사회 곳곳에서 5월 투쟁을 다시 바라보는 움직임이 활발하게 일고 있다.

5월 투쟁은 91년 4월26일 명지대 강경대군이 시위 도중 백골단의 쇠파이프 세례에 사망한 것을 계기로 촉발된 ‘노태우 정권 퇴진’ 투쟁이다.

4월29일 전남대 박승희양의 분신을 시작으로 한 달 남짓 11명의 열사가 분신·자살하는 등 전례가 없었던 분신 행렬이 이어졌다.

그러나 김기설 열사의 유서를 전민련 총무부장인 강기훈씨가 대신 썼다고 뒤집어 씌운 정부의 ‘유서대필사건’ 음모와 한국외대 정원식 총리가 학생들에게 달걀과 밀가루 세례를 받은 사건으로 운동권의 도덕성은 크게 훼손됐다.

결국 6월 말, 범국민대책위 간부들이 장기농성을 스스로 풀고 경찰에 검거되면서 5월 투쟁은 마무리된다.

당시는 가혹한 노동자 탄압 등 공안정국이 형성되고 노태우 정권이 정권 재창출을 위해 3당 합당을 단행했던 시기였다.

게다가 물가 상승 등 경제 상황도 최악에 이르러 민중들의 불만은 높아져만 갔다.

이런 극한 상황에서 분출된 분노는 ‘분신’의 형태로 표출된다.

현 정권에 대한 분노와 투쟁의 절박함을 사람들에게 일깨우기 위해 마지막 수단인 자신의 몸을 불살랐던 사람들. 분신은 그 때 그 사람들로서는 최선이었던, ‘치열한 저항의 극단적 표현’이었다.

5월 투쟁이 그동안 제대로 된 조명 한번 받지 못한 것은 투쟁 이후 적지 않은 사람들이 절망감에 운동판을 떠났고 아픈 기억을 애써 잊으려 했기 때문이다.

“친구들을 떠나보내야만 했던 슬픔과 상처를 다시 끄집어내기엔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했다”는 당시 인하대 김윤철 총학생회장의 말처럼 의미를 재조명해야할 ‘주체의 부재’가 평가를 전무하게한 이유로 작용했다.

2001년 5월 현재, 사회 곳곳에서 5월 투쟁을 재조명하는 것은 단순히 그로부터 ‘10년’이 흘렀기 때문만은 아니다.

“지배와 억압의 이데올로기는 그 형태만 다를 뿐 지금도 그대로 존재한다”는 성공회대 조현연 교수(정치학 전공)의 지적에서 우리는 이 투쟁의 현재성을 엿볼 수 있다.

현 정권의 신자유주의 정책으로 노동자들이 거리로 내몰리고 대우자동차 투쟁에서 국가의 폭력성이 다시 대두되는 지금, 5월 투쟁의 재조명은 현실에 대한 저항의 의미를 지닌다.

또 당시 유서대필 사건과 한국외대 정원식 총리 폭력사건에 대한 올바른 진상규명이 되지 않아 이 사건은 아직 끝나지 않은 ‘현재진행형’이다.

많은 사람들은 5월 투쟁이 가지는 중요한 의미 중 하나를 90년대 운동의 변화를 위한 ‘계기’라고 말한다.

“시민들이 보도블럭에서 한 발자국도 내려오지 않았다”는 민주노동당 박홍순 기획위원장의 말처럼 집회는 잘 짜여진 대오만 있었을 뿐 대중이 없는 ‘그들만의 투쟁’이었다.

당시 전노협 산하에서 투쟁에 참가했던 오재헌씨는 “분명히 분개할만한 사안에도 대중들을 거리로 이끌지 못했다”며 투쟁을 이끌었던 운동 주체들의 역량을 비판한다.

사회가 다양화되고 대중들의 관심 또한 환경, 여성, 인권 등으로 넓어지는 상황에서 운동도 대중 속에 파고 들어가지 못하면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을 91년 5월 투쟁은 보여준 것이다.

그 후 민주노총이 대중적으로 성장하고 민주주의 민족통일 전국연합, 민주노동당 등의 설립에 기반이 된 것도 이 투쟁의 성과다.

또 87년 6월 항쟁에서의 요구사항은 직선제 개헌이었지만 91년 5월에는 ‘대안국가권력’에 관한 요구가 등장함으로써 그 적극성이 엿보인다.

노동자와 학생연대가 두텁게 형성돼 사회 아래층의 민중이 시작부터 함께했다는 것도 6월 항쟁과의 차별점이다.

그러나 운동 세력들이 5월 투쟁을 계기로 ‘변화’를 위해 얼마나 치열하게 고민했느냐에는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5월 투쟁 이후 운동이 침체의 길을 걸어온 데는 다양화된 대중의 욕구를 받아들이지 못한 채 예전의 투쟁에만 머물렀다는 이유가 큰 몫을 차지한다.

5월 투쟁에 대한 평가가 이제 첫걸음을 내딛고 있다.

적극적인 진상규명과 명예회복 노력 없이 단순히 ‘열사 추모’에 그치고 마는 재조명은 투쟁을 또 한번 역사 속에 묻어버릴지도 모른다.

이주영 기자 nanna82@ewha.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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