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부재판을 지원하는 후쿠야마 연락소’집행위원 오카무라 미치코씨

첫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꼭 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어딘가 우리와는 다르다는 느낌. “안녕하시므니까? 저는 오카무라 미치꼬입니다.

” 국적:일본, 나이:33살, 결혼여부:미혼, 사는 곳:이대 후문 근처 하숙집, 일본에서의 직업:임시교사, 현재 직업:연세어학당 학생…. 여기에 ‘위안부할머니 돕기’가 더해진 그녀의 서울살이는 뭔가 사연이 있어보인다.

92년, 한 위안부할머니가 일본군위안부 생활에 대해 증언한 기사를 보고 충격을 받은 오카무라씨. 그것을 계기로 대구 위안부할머니를 돕는 모임과 교류도 하게 되고 98년부터 ‘관부재판(관부:시모노세키)을 지원하는 후쿠야마연락소’에서 활동도 했다.

지난해 9월 한국에 온 후, 그녀는 연세어학당에서 한국어를 배우고 일주일에 두 번 평화시민연대에서 자원봉사를 한다.

요즘은 일본어 책자와 나눔의 집에서 발행하는 일본인 대상 팜플렛 ‘일본군 위안부란 무엇입니까?’ 교정일을 도와주고 있다.

작년 10월부터 올해 2월까지는 한·일 시민 서명운동도 했다.

“이런 일을 일본인이 나서서 한다며 돈이나 귤을 쥐어주고 가는 시민들이 많았어요.” 추운 겨울, 서툰 우리말로 서명을 받는 그녀의 모습은 우리에게 많은 생각거리를 던져줬을 것이다.

아무리 의미있는 일이라지만 직장까지 그만두고 이 곳에서 한국어를 배운다는 건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텐데. 위안부할머니들을 만나고 얘기 나누면서 그네들과 일본어로 대화한다는 게 참 이율배반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그분들에겐 일본어도 위안부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아픈 역사 아닐까요? 제가 한국어를 배워 할머니들과 한국어로 직접 대화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배운 기간이 짧은 것에 비해 한국어 실력이 훌륭하다는 칭찬에 “그른데(그런데) 너무 오렵스므니다(어렵습니다). 특히 받침이 그래요”하며 쑥스러워한다.

가족들의 반대는 없었냐는 물음에 그녀의 활동을 묵묵히 이해해줘서 참 고맙단다.

교류하면서 친해진 사람들이 일본에 올때면 집에 데리고 가 함께 묶기도하며 가족들과도 자연스레 정이 들었다고 한다.

통역을 도와주러 온 친구 이령경씨와는 대구 모임과의 교류에서 만난 사이. 일본어와 서툰 한국말을 섞어가며 얘기하다 가끔씩 눈만 마주쳐도 웃는 그들의 모습에서 오래된 친구사이의 끈끈함이 느껴진다.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일본정부의 배상을 요구하는 관부재판. 98년 1심에서는 위안부할머니들이 승소했지만 지금 일본정부가 항소한 상태다.

1심에서의 승소는 지금까지 일본 전후보상 재판 중 처음으로 이룬 쾌거라 그 자체로도 사람들의 많은 관심을 불러일으켰다고 한다.

위안부할머니들의 피해를 보상해주는 법적 근거가 없는 상황인데도 이런 판결이 난 것은 굉장히 이례적인 일이라고. 일본인들이 잘못된 과거를 인정한 후에야 양국 간의 진정한 교류가 이루어질 수 있다고 말하는 오카무라씨. 그러나 위안부 문제가 쉽게 꺼낼 수 있는 화제가 아니라서 많은 사람에게 이 문제를 알리기가 어렵다고 안타까워한다.

“할머니들의 연세가 많아서 한 분, 두 분 자꾸 돌아가시는데 일은 빨리 해결되지 않아 참 힘들어요.” 오는 6월 일본으로 돌아가 교사 임용고시를 준비할거라는 그녀의 꿈은 선생님이 돼서 학생들에게 한·일 간의 올바른 역사를 가르치는 것. “아, 이거요? 매향리 갔다가 산 거에요.” 책가방에 ‘주한미군 철수’뱃지까지 달고 다닐 정도로 우리나라 사회 이곳 저곳에 관심이 많다.

예전에 머물렀던 집에서 선물 받았다는 감빛 생활한복이 참 잘 어울린다.

이주영 기자 nanna82@ewha.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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